밀과 보리이야기
밀과 보리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7가지 소산물 가운데 대표적인 곡식이다. 나머지 5개는 모두 여름 과실이며 이는 무화과, 포도, 올리브, 석류, 종려나무를 가리킨다. 성서시대에 보리는 밀의 절반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고, 거칠고 씹기 힘들고 소화가 힘들어서 빈궁기에 먹는 최후의 식량으로 쓰였다. 곡식과 관련된 근동의 신으로 등장하는 다곤 신은 원래 헷에서는 곡식과 달의 신이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곡식의 신으로 의미가 전환되었다. 상반신은 사람의 모양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것을 보면 마치 ‘인어’와 비슷한 형상이다. 학자들은 ‘다곤’의 이름이 물고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인 ‘다그’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헷 족속으로부터 일찍이 철기문명을 익히고 고도의 선진문명을 접수한 블레셋은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이후로도 헷 족속에게서 배운 다곤 신을 숭배했다. 이들이 정착한 서부 해안 평야의 남쪽인 블레셋 평야 자체가 이스라엘의 최대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곡식의 신 다곤은 블레셋의 주요 신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유월절이 있는 4월경 보리를 추수하고, 이로부터 7주 후에 있는 칠칠절에는 밀을 추수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농경 시즌이다. 타작마당은 추수한 곡식을 타작하는 장소인데, 단순히 농경적 의미만 있는 장소가 아니다. 타작마당에는 농경문화인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서 일년 농사를 타작하기에 앞서서 바알 제사장들의 종교적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다.
바알은 농지의 수확을 가져오는 기후의 신인데,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의 6개월 동안 바알은 죽음의 신인 ‘모트’와 싸움을 한다. 사람들은 바알이 죽음의 신인 모트와의 혈전에서 살아 돌아오기를 간구했다. 그가 살아오면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10월경에 이른비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때 바알 신전에서 성창들의 성행위가 종교적으로 이뤄어졌다. 여리고 성의 기생으로 알려진 라합도 이런 바알 신을 섬기는 성창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식으로 이해 해서 ‘평양기생’쯤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바알은 남자 신이고 성경에는 바알의 배우자로서 아낫, 아스다롯, 아세라 등 3명의 여신이 등장한다. 풍부한 수확을 바라는 종교적 행사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성창들의 성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성행위를 자연물의 풍성한 수확과 연결시킨 고대인들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새 생명이 탄생하듯, 뿌린 ‘씨’와 그것이 떨어진 ‘밭’이 만나서 수확의 결실을 이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신랑되신 하나님을 떠나 신부 이스라엘의 배반을 가리켜 ‘타작마당에서 음행을 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호 9:1).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농경문화 속에 들어가면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 신에 함께 동화되고 있었다. 여호와는 광야의 신이고, 새 시대, 그리고 새 문화에는 새로운 신을 섬기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합 왕 때에는 북이스라엘이 거의 바알과 아세라 신으로 만연했고, 여호와 신앙은 그야말로 무늬만 남아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유행과 거스려서 담대하게 하나님 편에 섰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며 바알 신전이 있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음행을 즐겼던 것이다.
곡식은 자연 상태로는 소화가 쉽지 않지만 초봄의 곡식은 부드러워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다. 마태복음에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이삭을 비벼서 먹은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시대에 자연상태에서 먹기 힘든 곡식을 가공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살짝 불로 굽는 것이었다. 불에 구우면 곡식 속의 전분(starch)이 단맛을 내는 호정(dextrin)으로 변하여 먹기 좋은 상태로 변한다.
보아스는 자신의 밀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룻에게 볶은 곡식을 배불리 먹이며 호의를 베풀었다.
성서시대 여인들의 하루는 맷돌질로 시작했다. 방아간이 없던 성서시대에 밀가루를 얻는 방법은 집집마다 있는 맷돌을 잉요하는 것이 유일했다. 그래서 성서시대에 맷돌을 저당잡는 행위는 살인행위와 같았다. 나귀가 돌리는 연자 맷돌이 한 시간에 8㎏의 밀을 갈 수 있는 반면, 집집마다 있는 손 맷돌은 한시간에 고작 800g의 밀을 갈수 있었다. 당시 1인당 하루에 먹는 양이 500g이었으므로 6인 이상의 가족을 먹이기 위해서 여자는 하루 4시간 이상은 맷돌질을 해야 했다. 현숙한 여인은 식구들이 모두 자는 시간인 밤이 새기 전에 일찍 일어나야만 가족들에게 식물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성서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면 맷돌 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형 방앗간이 없던 시대에 집집마다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최소 4시간 이상의 맷돌질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동네에 맷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동네가 안정되고 풍요롭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일상적으로 돌려야 할 맷돌 소리가 끊어진다는 것은 ‘평상시 누리던 일상적 평안과 행복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