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1500년 역사를 따라서…
셀주크, 파티마-아이유브 십자군 왕국의 3파전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란한 이슬람 문명을 창조한 압바스 왕조의 시대는 공식적으로 750-1258년이다. 하지만 압바스 왕조 500년은 945년에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실제적인 종말을 고했다. 그럼에도 왕조의 최종적인 멸망을 1258년으로 잡는 것은 비록 땅은 없지만 이후에도 왕조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명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군소 국가들이 로마의 교황에게 최종적인 인준을 받았듯이,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약화로 지방에서 생겨난 수많은 독립국가들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인준을 받았다. 하지만 몽고 제국을 일으킨 칭기스칸의 손자인 훌라구가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해 명맥뿐인 칼리프의 숨통을 끊어버림으로써 압바스 왕조는 공식적인 종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번 호부터는 945년에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몽골에 의해 최종적인 멸망을 당하는 1258년까지, 즉 압바스 왕조의 후반부 역사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시기의 역사가 큰 맘 먹고 이슬람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녹다운 시킬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3대륙에 걸친 드넓은 이슬람 제국은 이 시기에 저마다 독립을 선포하고 이름도 외우기 힘든 왕조들이 각 지역에서 우후죽순 생겨났다.
십자군 운동(1096-1291)은 이슬람의 질풍노도와 같은 진군 앞에 내륙으로 숨어들어가 있던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세계에 가했던 최초의 반격이었다. 이슬람 세계 한복판에서 십자군 왕국이 버젓이 활개를 펼 수 잇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도인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지방은 압바스 왕조의 중앙무대였다. 하룬 알 라쉬드(786-809)의 통치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는 그가 죽고 칼리프 자리를 놓고 두 아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본격적인 내리막 길로 치달았다. 이라크에 세력을 둔 알 아민과 이란에 세력을 둔 알 마문의 승리로 끝났다.
이란에서 알 마문을 도운 따히르 장군이 독립왕조를 열면서 일찌감치 제국의 동쪽은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갔다. 따히르 조(820-873), 사파르 조(867-913), 사만 조(874-999), 부와이흐 조(945-1055), 가즈니 조(997-1186). 이 왕조들 가운데 부와이흐 조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 945년 압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출범한 부와이흐 조는 칼리프를 제거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칼리프를 즉위시키고 폐위시켰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정통 순니파인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이단 종파인 시아파를 추종하는 부와이흐 조의 보호령으로 떨어진 것이다.
셀주크 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목민인 터키족 출신 왕조로서 제국 동부의 혼란을 수습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한다. 투그릴 베그와 차그릴 베그 형제(1038-1063)에 의해 시작된 셀주크 조는 1055년 바그다드를 함락해 110년간 이어온 부와이흐 조의 칼리프에 대한 후견을 그끝내고 새로운 후견으로 나선다. 셀주크 조는 정통 순니파를 따랐기 때문에 몰락해 가던 순니파의 대부활은 터키 왕조의 보호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200년간 이어지던 제국 동부의 혼란을 통일한 셀주크 조의 통치자는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왕을 의미하는 ‘술탄’으로 선포하며 정복전쟁에 나섰다.
조카인 알프 아르슬란(1063-1072)이 술탄이 되면서 당시 유럽 세계까지 뒤흔드는 강진이 일어났다. 그로인해 200년 동안 유럽대륙을 휩쓴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071년 반 호 전투에서 비잔틴의 주력군을 대파하며 비잔틴 황제인 로마누스 4세까지 포로로 잡힌 사건은 유럽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 중앙아시아 초원을 떠돌던 보잘 것없는 셀주크 인이 비록 전성기를 지났지만 로마 제국의 후예인 비잔틴 제국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서부인 북아프리카는 동부보다 더 일찍 이탈현상이 발생했다. 이드리스 조(788-921, 현재의 모로코 지역), 아글라브 조(800-909, 현재의 튀니지 지역). 북아프리카에서 모로코와 튀니지에 독립왕조가 출범하자 이집트도 술렁대기 시작했다. 결국 두 개의 독립왕조가 이집트에도 순차적으로 출현한다. 뚤룬 조(868-905), 이흐쉬드 조(935-969).
북아프리카에 우후죽순 난립하던 독립 왕조들은 파티마 조가 등장하며 통일을 이루게 된다. 시아파 이단에서도 극단적인 이스마엘파를 신봉하던 파티마 조의 출발지는 예멘이었다. 북아프리카로 파견된 이스마엘파 선전요원은 909년 베르베르족 지원을 엎고 아글라브 조(튀니지)를 무너뜨리고 파티마 조를 출범시켰다. 921년 이드리스 조(모로코)까지 무너뜨린 파티마 조는 이집트만 남겨둔 상태였다.
이슬람 제국의 곡창지대인 이집트 정복에 두 차례나 나섰다가 실패한 파티마 조는 4대 이맘(순니파의 ‘칼리프’를 시아파에서는 ‘이맘’이라 부른다)인 알 무이즈(953-975) 때 기회가 찾아왔다.
기근이 강타해 허우적대던 이집트(이흐쉬드 조)는 969년 파티마 조에게 넘어갔고, 파티마 조는 카이로를 떠오르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여세를 몰아 시리아와 이슬람의 요람인 메카, 메디나 지역까지 차지한 파티마 조는 알 무스탄시르(1036-1094)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 국가로서 파티마 조는 바그다드 칼리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복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 즉 예언자의 직계후손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파티마 조 이맘들은 강력한 군주가 되었고, 이 시기에 이집트는 교역과 산업이 꽃 핀 실로 위대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