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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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07 21:4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 8- ‘교회 헌법’의 비성경적 불법성 폭로와 대안 찾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1.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에 응답할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가 있는가 ?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0장은 ‘효력 있는 부르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시는 사역(소명)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효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 고백서의 내용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점에 대한 재검토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성경적 근거와 관련해서 자유롭게 그리고 밀도 있게 좌담회에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P연구생  저는 먼저 고백서의 논리적 문제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호에 살펴본 9장과 오늘 다루고 있는 10장은 논리적 연결성 부분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9장에서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했는데, 10장에 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소용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합니다. 물론 10장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지만, 다시금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는 부분이 나온다고 봅니다. 신앙고백서의 순서에 대한 논리적 구성을 볼 때 일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서라고 내어놓고 성도들에게 그대로 고백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신앙고백적으로’ 무책임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박홍기 연구원  방금 앞서 지적하신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좌담회에서는 지금 신앙고백서 내용의 거의 삼분의 일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 나오는 내용을 개관해 봤을 때, 고백서의 구성면에서 ‘논리적 연결성’은 한마디로 너무 허술하고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반을 둔 ‘인본주의’ 내지 ‘인간중심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점점 더 철저하게 비판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신앙고백서 10장의 구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인간의 자율성’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1항과 2항에 나타나는 접속사 ‘그러나’에 주목하면 이것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앞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후는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성경을 인용해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단순 명령문을 우리가 실천해야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 효력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는 은혜로서 가치가 사라집니다. 성경의 명령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명령문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분명하게 확정해 주시는 방법이며,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성취해주시겠다는 신적인 절대의지의 계시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인간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방식이라면 개혁파 교회나 공로주의를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이나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신앙고백서 10장은 꼼꼼하게 읽어서 확인하고 비성경적인 부분을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백서를 뒷받침하는 성경 본문의 인용도 확인해야 합니다. 제10장 1항 끝부분에 보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아오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아오게 하신다는 것으로 고백은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원’과 인간의 ‘자유’로 마무리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자원한다는 것과 자유롭게 나온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한 바가 크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절대의지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인간의 ‘자원’과 인간의 ‘자유’는 군더더기이며, 이러한 발상은 인간 중심적 발상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 강조는 2항에 가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고백문의 표현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와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고 있는 꼴입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활짝 열어놓으려고 합니다. 백여 명 이상의 회원들이 모여 만든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야말로 개혁파 신앙고백의 혼동이라고 강하게 지적하고 싶네요. 이렇게 인본주의로 끝나는 고백서 내용들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개혁파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토대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 정말로 화나고 딱하고 서글픕니다.

S연구생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향하는 고백서 10항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이 효력이 있으려면 인간이 결국 자원하거나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와야 하고 그래서 ‘응답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즉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의 효력은 인간이 응답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죠.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만 비(非)성경, 반(反)성경으로 흘러가고 있네요. ‘자발적’ 혹은 ‘자원하는’이란 표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말입니다.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나오게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소명이 전택설로 시작하고 후택설로 갔다가 그리고 자유의지론으로 그래서 알미니안주의로 매몰됩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현대의 개혁파 신학 전통에 속한다는 교회를 보면 거의 앞의 방식을 따라간다고 봅니다. 수백 년 전 신앙고백서가 이렇게 혼동되어있다는 사실을 볼 때, 근·현대 개혁파 교회가 몰락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객원기자  앞부분은 칼빈주의 종교개혁 사상을 주장하는 참석자의 입맛에, 뒷부분은 신인합력의 알미니안주의의 입맛에 맞추고 있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제10장 3항을 보면 그렇게 틀린 내용이 없는 듯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죄가 없으므로 천국에 간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4항까지 더 평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박홍기 연구원  얼핏 보면 문제가 없는 고백 내용인 듯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3항의 내용과 2항의 내용이 상호모순 된다는 것입니다. 2항에서는 인간이 응답할 수 있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3항에서는 택함 받은 어린 아이는 어려서 죽는다 하더라도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왔다 갔다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어린 아기야말로 자기고백적인 말로 응답할 능력이 없으므로 정말로 구원을 확정 지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소명과 관련된 4항을 보면 거짓 명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2항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점과 관련해서 4항을 보면, 결국 효력 있는 소명은 인간의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효력 있는 것이 되려면 하나님이 우선 인간에게 독립된 신앙적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제대로 사용할 때 효력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효력 있는 소명’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대화하는 비성경적 고백이다!


2. 하나님께서 베푸신 칭의에 인간의 독립된 신앙이 가능한가 ?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은 ‘칭의(稱義)’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백서 도입 부분의 전반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1항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항에 보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여 의지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고, 이 신앙이 칭의의 유일한 도구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칭의도 인간이 최종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그 의로움에 의지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칭의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마칩니다. 이에 대해 개혁파 신학의 칭의론 전반에 대해 비판을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계시적 관점’에서 전통 개혁파 신학의 칭의론을 정리할 수 있도록 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앞서 지나온 제10항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지적하고 11장 칭의에 대해 제 생각을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의 효력 평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주권적 능력과 전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렀으므로 구원의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 효력을 인간이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합니까? 행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간이 거부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의 효능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고 할 것인가요? 인간이 거부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반항에 굴복했다는 말인가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처럼 상대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경건이며 불의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듣게도 하시고 듣지 못하게도 하십니다.
11장 칭의에 관해서도 은혜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친다고 봅니다. ‘소명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5항에 가면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범죄 할 경우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빌어 신앙과 회개를 새롭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하며 인간의 자발적 순종이 있어야 칭의가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2항의 ‘받아들여 의지하는 신앙’은 인간이 받아들이고 인간이 스스로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뜻이죠. 이러한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3항에 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신다’는 논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을 인간이 다시 실천해야 한다는 발상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성경적 주장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뒤집는 결정적인 내용이 5항에 가면 나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죄를 고백해야 하며 용서를 빌어야만 하나님은 신앙을 주시고 회개를 받아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다시 떠올려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치는 과정을 아브라함 전체 생애에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믿음’을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연단시켜서 그의 믿음을 보호하여 간직하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것이라고는 불신과 불순종이 전부입니다. 우리와 달리 특별히 그에게 의가 될 만한 행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고 실천은 인간이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상대적 존재로 봄으로써 절대주권과 은혜의 ‘여호와의 계시 사역’을 인본주의화로 몰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하면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나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영원하신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은 순간순간 육체의 소욕이 발동하지만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여 성령의 소욕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칭의의 교리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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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요더의 윤리학 <2>
존 요더의 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