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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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11 19:0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비판과 정리 2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객원기자  오늘 좌담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7장부터 제14장까지 다시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7장)부터 ‘중보자 그리스도’(8장), ‘자유의지’(9장), ‘유효한 소명’(10장), ‘칭의(稱義)’(11장), ‘양자(養子)됨’(12장), ‘성화(聖化)’(13장), ‘구원’(14장)이 주제들입니다. 지난 좌담회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신앙고백서가 성경권위에 의존하는 듯하지만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늘 꽤 많은 주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자유의지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진행하리라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개혁파 교회에서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결정적 원인 제공자가 웨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임을 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신앙고백서’)의 언약관은 한마디로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칼빈 이후 개혁파 신학이 알미니안주의로 흘러간 결정적 증거가 바로 신앙고백서 7장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인간은 자유의지로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전제합니다. 절대자이시며 만사만물을 작정하신 대로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피조물인 인간이 최종 결정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 심각함을 다르게 말하면 피조물이 창조주를 주관하겠다는 것이죠. 창세전 영원한 작정대로 온 우주만물과 세상을 만드시고 이미 확정해 놓은 종말까지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적으로 모든 피조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절대주권을 강조한 칼빈 사후 백 년도 지나지 않아 개혁파 교회는 인본주의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앙고백서 7장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께 ‘오직 순종할 의무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전제한다는 뜻입니다. 언약의 성취는 인간의 손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전해보면 듣게 되는 반응 중 ‘모든 것이 창세전에 작정되었다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일쑤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으므로 만사는 하나님의 작정대로 될 뿐이므로, 인간이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자유의지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말이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고백서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하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입니다.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순종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하는 알미니안주의를 이 신앙고백서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16세기 개혁파 신학의 토대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절대주권이었는데, 인간의 독립된 의지를 사상의 근본 토대로 삼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랐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이미 개혁파 신학의 왜곡과 좌경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개혁파 신학의 대표적 신앙고백으로 수백 년 동안 마치 성경적인 가르침에 충실한 것처럼 그래서 기독교 법전(法典)처럼 사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종말(終末)을 고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종말을 고해야 한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한 이 신앙고백은 한국 장로교 헌법의 토대가 되어 교회의 온갖 비성경적 불법 조항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유래 없는 한국 개신교의 불법과 부패 상황에 이 신앙고백서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하루라도 빨리 종말을 선언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그리고 절대진리이며 교회의 유일한 법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속히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무지한 한국 교회 성도들이 훨씬 더 딱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진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성경과는 무관한 내용, 목사 말 잘 듣고 주일 지키고 헌금 잘 하면 천국도 가고 물질의 축복도 받는다는 것에만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P연구생  두 분의 지적을 듣고 생각이 났는데, 이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 2장 16~17절(제7장 2항)을 ‘최초의 언약’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언약을 스스로 지키지 못해 지옥으로 가야 할 형편인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해서(?) ‘응급처방’처럼 준 것이 창세기 3장 15절 ‘은혜 계약’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의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이상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잘못한 일을 벌이면 하나님은 뒤따라가며 수습하는 존재가 됩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당시 17세기 중엽은 영국 사회에서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이 대세였습니다. 시민들이 서로 합의한 계약을 자신들의 의지로 잘 지키면 ‘준법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불법자’가 됩니다. 제7장 ‘하나님의 언약’을 보면 당시 영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회계약론’과 큰 차이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속화된 계약 개념으로 창세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결과인 ‘언약’을 평가하려 했으니 신앙고백서가 어떻게 구성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CH연구생  원로의 저서 『무엇인가』 시리즈 3권에 보면 ‘성경적 언약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평가해 본다면, 신앙고백서의 치명적 오류는 창세기 1장 28절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해야 한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하는 가장 구체적인 내용을 바로 창세기 2장 16~17절로 선택했으며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자 이를 최초의 계약 곧 ‘행위계약’이라고 규정했다고 봅니다. 이후 개혁파 신학은 인간의 독립된 의지와 자율적 실천을 신학의 대전제로 삼게 되었으며, 결국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게 되었다고 봅니다.

S1연구생  1항에 보면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자원적으로 자기를 낮추심으로 인간은 축복과 상급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자원하여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6항에 가면 ‘말씀전파와 세례와 만찬성례집행’의 복수 조항들이 나오는데 이것도 은혜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치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보혜사 성령의 온전한 주권과 은혜는 처음부터 왜곡됩니다. 성령에 의한 말씀 전파의 내용이 성령세례이며 그리고 만찬집행은 먹고 마실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성도들에게 기억나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신앙고백의 ‘언약관’은
알미니안주의를 전제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왜곡하고 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연구생들이 말한 부분을 재차 더 강조할까 합니다. 제가 주창하는 ‘언약성취섭리사적 성경신학’에서는 창세기 1장 28절이 인간의 독립된 의지를 전제한 ‘문화명령’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삼대언약(三大言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자손과 땅 그리고 통치, 즉 국가와 통치 개념이 내용의 핵심인데 ‘문화(文化)’라는 용어도 어울리는 개념은 아닙니다. 화란 개혁파 교회가 인간을 세상 지배와 문화 창달(暢達)의 주체로 보고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으로 본 성경해석은 치명적인 결함이며 오류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이든 창세기 2장 17절이든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그 목적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계시 즉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속성을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 또 하나는 이러한 언약은 모두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언약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경을 인간이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실천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봅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S2연구생  8장에 보면 ‘중보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문이 나옵니다. 전통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 하나님’이며 ‘참인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참 하나님’(요 17:3; 요일 5:20)이란 개념은 성경에 나오지만 ‘참 인간’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용어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한복음에 나타난 신학적 개념으로 볼 때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요 1:1). 인성을 취했다고 해서 그분의 본성(本性)인 신성(神性)은 결코 훼손당할 수 없습니다. 인성을 취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고 해도 그 본성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인성은 우리의 죄성을 구속하시는 속죄주로서 그리고 죄에 대한 심판자로서 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을 대등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참 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미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성을 취하여 행동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피조물의 본성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성은 신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의 행위를 따라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의(義)’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 작성자들은 ‘참 인간’을 강조하면서 인간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처럼 행동할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관리하겠다는 매우 불손(不遜)한 태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참 인간’ 규정은 그 분의 본성이
신성임을 축소·왜곡시킨다!

J연구생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 인간’으로 칭한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신성 곧 하나님이심을 완벽하게 증명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복음서에서 신성을 본성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5항에 보면 ‘주 예수는 완전한 순종과 영원하신 영을 단번에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성’의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완전한 순종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인간의 몸으로 순종했다고 해서 인성이 한 것처럼 말하고 ‘참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그만큼 약화됩니다. 육의 몸을 입으신 것과 함께 죄를 전가 받으셨으므로 ‘참 인간’을 만들어 하나님께 인간으로서 순종했다고 말하면 예수는 그야말로 ‘인간 예수’가 됩니다. 우리 인간을 ‘미숙한 인간’으로 보고 예수님을 우리 인간보다 좀 나은 ‘참 인간’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 시키는 ‘중개인’ 정도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왜곡입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왜 ‘자유의지’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가?

객원기자  종교개혁 이후 130여년 후에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을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매몰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알미니안주의로 타락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제가 재차 확인한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성경적 근거로 신명기 30장 19절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신명기 28장부터 30장까지 내용 전체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40년 전에 모세에게 약속했던 언약을 재확인해 주는 내용입니다.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언약과 함께 동시에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복도 주지만 저주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 여부와 상관없이 복과 저주가 임한다는 약속의 내용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절대주권성을 성경으로 확증 못해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

Y연구생  창세기 2장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나무 열매를 ‘임의로 먹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인간이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8절의 삼대언약(三大言約)을 성취하시는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자유의지를 전제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로 이 구절에 접근하면 분명한 뜻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서구 개혁파 신학은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독립된 의지를 주장하는 서양철학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 자유를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을 부정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우연한 존재가 됩니다. 신앙고백서의 자유의지 주장은 신본주의가 인본주의로 추락하는 현장입니다. 비록 짧은 내용의 신앙고백서 제9장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론에 대해서는 너무도 치명적인 부분입니다. 원로 말씀대로 종말을 고해야 할 고백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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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무지
현대교회를 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