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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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29 20:0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택한 백성의 확증


사람은 행복하기를 바라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애당초 무리이다. 행복의 주관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행복론’을 공부하면서 그 해답을 얻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지혜가 알뜰하게 담긴 기독교 행복의 본질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머무는 동안에도 천국 생활을 누리게 하려고 종교적 조건으로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신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심령의 평강을 얻게 되면 만족감의 충만과 함께 감사가 넘치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행복의 결과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사랑에 의한 성실한 봉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얼른 들으면 부담이 가는 말이기도 하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로서는 사랑과 봉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론을 전개해보려고 한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택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완벽을 향해서 가게 한다.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장 2~4절에 보면 성령께서 사도 바울로 성도들을 칭찬하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기억하고, 기도할 때마다 자꾸 생각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심을 알겠다는 것이다. 그런 거룩한 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바울은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 그리고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에서 비롯된 확신, 참고 끝까지 인내하며 사랑의 봉사가 멈추지 않는 삶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위한 삶이다. 결과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힘으로 봉사가 이루어진다. 어느 방법으로도 행복할 수 없지만, 진리를 사랑하고 나보다 어린 영혼을 양육하는 데 조금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게 아름다운 봉사가 아닌가. 아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사랑의 봉사를 하게 하는 게 아니다. 택한 백성이 아닌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겠는가. 성령이 깨닫게 하지 않는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믿어지겠는가.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자가 어떻게 사랑의 봉사가 가능하겠는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봉사, 소망의 인내는 내가 택한 백성인가, 택함 받지 않은 백성인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행복한 사람 속에는 샘솟듯 솟아나는 하나의 속성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은 봉사하는 힘이 솟는다. 그래서 사랑과 봉사라는 것은 행복의 결과로 맺어진다. 생각해 보자. 남녀가 만나 행복하니까 사랑하여 자녀를 낳게 되면, 뼈라도 녹일 만큼 뜨거운 사랑의 힘이 솟는다. 그래서 그 자식을 위해서 부모는 온갖 봉사를 다하게 된다. 이게 간단한 원리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게 하니까 하나님이 믿어지고, 믿어지니까 마음에 평안이 오고 마음에 만족감으로 충만하니까 행복하다. 결국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공급되지 않게 되면 불평불만이 싹트고 불만족 속에서 속이 상하기 일쑤다. 그럴 때는 진심으로 말씀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행복한 삶은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전 인격적으로 변화되게 하는 삶, 그게 성도의 교회 생활로 이어지게 되고, 그래서 교회 생활은 즐겁고 행복하다. 그 이상 행복은 없다. 교회란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 봉사는 헛수고일 뿐이다.

행복한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은 봉사 생활로 나타나고 만다. 다 늙은 노모가 시골에 혼자 살면서 굽은 허리 움켜쥐고, 이 밭떼기 저 밭떼기 기어 다니면서, 참깨 심고, 들깨 심고, 콩 심고, 팥 심고, 마늘 심고, 고추 심고, 그걸 거두어서 올망졸망 담아서, 딸, 며느리 오면 싸주고, 다 주고 싶은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어버이의 심정이듯이, 뜻이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신앙하면서, 서로 사랑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아닌가. 주고 또 주어도 끝이 없는 부모의 사랑처럼 교회도 사랑을 먹고 자란다. 그 사랑을 배부르게 먹고 행복해하면서, 고맙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자녀들의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부모는 행복하다. 돈 몇 푼 주면 사먹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어머니의 따끈따끈한 사랑이 없지 않은가.
교회도 바로 그것이다. 정말 행복한 성도들의 뜨거운 사랑이 묻어있는 봉사, 성숙해 가는 과정이 서로 다르지만 정말 이 진리(성경신학)를 좋아하는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진리로 기뻐하고 행복해져서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땀도 나오고, 희생도 따른다. 수입이 적어도, 몸이 건강하지 않아도, 종교적 조건과 심리적 조건이 갖추어지면 행복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정말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이런 체계의 논리가 어디에 있을까. 교제에 보면 ‘종교적 조건을 기초로 한 심리적 조건이 구비되므로 얻어진 성도의 행복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성도의 생활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되고, 외적으로는 그 사랑에 의한 성실한 봉사를 하게 된다. 곧 전인격적으로 변화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박용기 저, 『기독교 행복론』 p.55참조)라고 되어 있다.

행복의 결과만큼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을까. 하나님께서 진리가 머리 두뇌에 들어가게 해서 생각을 바꾸게 하고, 가치관도 바꾸게 하고, 모든 의미와 목적을 바꾸게 한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진리를 사랑하고, 나보다 어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봉사하며,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함께한다. 그리고 어떤 역경이 와도 참고 견디게 된다. 이게 택한 백성의 확증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강미정 권사 (광주산수서광교회)

진정한 사랑
기독교 행복의 심리적 조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