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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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2-25 20: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정론의 담론(談論) 10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장 19절-20절 개역성경)

전통적인 기독교 개혁파 신학자들 대부분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 하지 않는다. 선(善)하신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윤리·도덕적이고 종교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을 연구한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신학적 논리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허용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또한,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의도 안에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라고 보지는 않는다. 학파마다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의 책임에 대한 비율을 다르게 해석하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를 고려할 때 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일부라도 전가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인간은 죄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비율로 나누어 측정하는 것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오류가 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면 인간 역시 신의 전지전능성 범위 내에서 즉, 신적인 영역의 일정한 지분을 소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유의지로 독자적으로 죄를 범할 수 있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범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의도하신 것인가? 등의 질문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반면, 사람들은 은혜만큼은 하나님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들의 죄악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인간 자유의지에 의한 범죄에만 한정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주장대로라면 인간이 스스로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 범주에 속한 은혜도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은 범죄에만 한정 짓고 있다.
따라서 지난번에는 죄와 관계없는 은혜와 죄와 관계있는 은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과연 하나님께서는 죄와 은혜의 관계에 대해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기록된 사실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차례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택한 백성을 죄로 때리시고 은혜로 싸매어 주신다. 이러한 죄와 은혜는 하나님 섭리의 방편이다. 여기서 때리시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섭리이고, 싸매어 주시는 것은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섭리의 한 방법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구약 역사 과정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때리시고 싸매시는 근본적인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때리시는 ‘징계’와 싸매시는 ‘긍휼’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때리시는 징계의 이유는 예레미야 2장 19절에 말씀하셨듯이 택한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경외하지 않는 죄가 징계의 이유임을 밝혀주고 있다. 징계의 대상은 히브리서 12장 7절에서 8절 본문에서 언급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즉 택한 백성이라고 증거 해 주고 있다. 반면 징벌은 불택자들에게만 있다. 그리고 징계의 방법은 상황에 따라 질병, 재앙, 이방민족을 막대기로 사용하여 백성들이 범죄 할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때리신 사실이 구약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징계의 결과는 진리를 알게 하거나 마귀의 유혹을 버리고 하나님 뜻을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징계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범죄의 대가로 주는 형벌이 아니라, 택한 백성으로 깨닫게 하여 구원하시는 영원하신 작정 안에 내재되어 있는 계시 섭리의 한 방법인 사랑의 채찍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범죄로 인한 징계의 상처를 싸매시는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는 창세전에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다. 긍휼의 대상은 제한적으로 창세전에 택한 언약백성이다. 긍휼을 베푸시는 방법은 징계에 대한 회복으로 대적 보수, 재앙을 그침, 죄 사함, 기업의 보증이 되어 성도들이 인치심을 받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시는 궁극적인 결과는 구원으로 나타난 것을 증언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목적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택한 백성들을 언약대로 구원하시려는 영원한 작정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섭리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것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심은 창세전에 작정하신 경륜을 계시하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창세전에 선택하여 예정하시고 그 예정대로 구원하실 것을 언약하셔서 이루시는 섭리도 창세전에 작정하신 경륜을 계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택하신 언약백성을 때리시고 싸매시는 섭리는 물론, 신약시대에 택한 성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섭리 역시 창세전에 작정하신 경륜을 계시하시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택한 백성들을 범죄로 인하여 가두어서 종으로 살게 하셨다가 은혜로 놓아 주어 아들로 살도록 섭리하신다. 구약시대에는 범죄한 택한 백성들을 이방 대적의 지배 아래 있게 하셨다가 벗어나도록 하셨다. 그 예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는 애굽의 종 되었던 사백 년 종살이에서 놓임을 받았다. 이는 창세기 15장 12절에서 16절 본문의 언약대로 성취되었던 사건이다. 또한, 레위기 26장 14절에서 45절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에 붙이셨다가 회복해 주실 것을 언약한 사실이 있다. 이 언약이 성취되어 사사기, 사무엘상·하, 역대상·하 등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나라의 지배 아래 있다가 다시 회복시켜 주셨던 사건들이 다수가 있었다.
신약시대에는 악이 인간의 내면에 구체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죄성을 통하여 언약백성을 죄의 법 아래 가두어 종이 되게 하셨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해방시키셔서 아들로 삼고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위의 본문 로마서 7장 19절에서 20절을 살펴보면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죄가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종으로 삼아 굴복하게 하는 결과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인간이 범죄 하는 것이 자기 자제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신 수련을 통하여 자기 마음가짐을 강화시키는 수행을 한다. 이러한 실천이 인간 스스로가 선을 행할 수도 있다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범죄를 하는 것은 육체의 소욕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육체의 소욕은 인간 스스로가 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에 의해서만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17절 본문에서 증거 해 주고 있다. 대다수는 이와 같은 논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육체의 소욕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의 권세 즉 사단의 권세 아래 있으며,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세 아래 있다. 서양의 이원론 사상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사단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내비쳐진다. 그러나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사단의 지배하에 속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타락인, 중생인 모두 독자적인 행동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타락인, 그들의 모든 삶은 육체의 소욕에 의해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는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며 성령의 열매를 맺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로마서 7장 25절 참조)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은혜로 구속하여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도록 섭리하신다.(갈라디아서 4장 4절-7절 참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인간의 공로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는 창세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따라 정하신 때에 은혜로 이루어 주신 결과이다. 이러한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계시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다.

세 번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죄로 말미암아 죽게 하시고 은혜로 살리신다. 그러므로 죄와 은혜의 관계에 있어서 이 두 개의 어휘는 상호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범죄가 없으면 은혜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이 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성과 전능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많은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죄를 범하도록 섭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살리실 바에는 어떻게 해서 죄인 되게 하셔서 죽이시는가 등이 있다. 이러한 의문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7절에서 18절 본문을 통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과 정죄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로 증거하고 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이 인간의 내면에 구체화 된 죄로 인해 범죄한 인간을 죽이시는 것은 언약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명하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는 섭리이다. 레위기 24장 16절에서 17절 본문에 율법은 법을 범한 백성들에게 죽음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외의 범법자들에게는 짐승의 피를 흘려 제물로 드려 죽음을 대신하였다. 이러한 것에 반해 하나님께서 범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은혜로 살리시는 것은 이 역시 언약 백성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는 섭리였다. 여기서 율법을 어김으로 언약 백성들이 멸절되면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약속하신 은혜언약이 파기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레위기에서 속죄에 대한 규례를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정죄기능과 사죄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실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이러한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로 인한 택한 백성들의 죽음을 대신하셨고, 부활하신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시려는 은혜의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시고 완전하게 세우셨다.(로마서 6장 2절-4절 참조) 또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도 완전하게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창세전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죄와 은혜의 관계가 동떨어질 수 없음을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신학자나 성경교사들은 행위언약인 율법을 준수하여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쌓아서 구원과 현세의 물질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로 기록하게 하신 갈라디아서 5장 4절 말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 3장 다수의 구절에서 오늘날에도 교회당에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메아리 같은 소리의 오류에 대한 해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율법의 요구와 같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어 죄인이 되게 하신 이유는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만 새 생명을 얻어 살게 하시려는 데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진리의말씀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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