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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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2-25 20: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의 절대 권위와 성경 본문의 편집(III)


1. 말씀의 신적 권위와 그 운동력,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채택하게 하다
16세기 중반 프랑스 개혁파 신학자이자 인쇄업자인 로베르 에스티엔(Robert Estienne, 1503-1559)은 성경에 절(節)을 추가한다. 그때 그는 로마 가톨릭이 사용했던 불가타 라틴어 성경이 아니라 헬라어 원문 번역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사용한다. 원전에 충실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읽기에 더 편리하도록 장(章)에 절(節)을 추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절 기입에 사용한 성경 공인본문은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그 기초를 놓았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하기 1년 전 1516년에 최초로 인쇄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한다.

에라스무스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무지를 비판하면서 비판과 극복 그리고 그 대안으로 헬라어 성경 연구를 강력히 제안했으며 스스로 재편집 작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중세의 왜곡된 신학과 교회의 폐습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과 가톨릭의 극단적 분열을 경계하면서 인문주의적 합의와 성경에 대한 비평적 연구를 강조한다. 하지만 유럽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의 소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초를 놓은 공인본문 정립 시도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목표에 유익하게 작동했다.

에라스무스가 공인본문을 출판할 당시 로마 가톨릭은 히에로니무스(Jerome, 347년경-420년경)의 라틴어 불가타 성경(Vulgata)을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불가타 성경이 원문과 차이가 큼을 지적하면서 필사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원문에 충실한 신약성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렇게 시작한 공인본문은 이후 여러 차례 개정과정을 거쳤으며 로베르 에스티엔(Robert Estienne, 1550년)과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의 개정 이후 공인본문으로 확정된다. 이렇게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연구는 성경의 원문을 강조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성경 번역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그의 성경을 사용하여 성경 번역을 진행했으며,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성경권위 핵심 원리를 강화하는 데 주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에라스무스의 3판(1522년)은 후에 1611년 킹 제임스 성경(KJV) 번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에라스무스의 뒤를 이어 (앞에서 언급한) 에스티엔은 총 4번(1546, 1549, 1550, 1551년)에 걸쳐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본문을 출판하였으며 그중 1550년 판본은 공인본문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1546년과 1549년 판은 비교적 초기 형태의 신약성경 그리스어 본문이었으며 1550년 판(Editio Regia, 왕실 판)은 최초의 비평적 신약성경 텍스트가 되었다. 비평적 텍스트 과정이란 여러 사본을 비교하여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본문을 선별하려는 연구 방법이다. 서로 다른 본문에 대해 주석(註釋)으로 제시하여 독자들에게 본문 선택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렇게 1550년 공인본문은 단순한 복제본이 아니라 신약성경 본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편집한 첫 번째 비평적 텍스트가 되었다.

에스티엔의 공인본문 편집의 업적은 테오도르 베자의 공인본문 확정의 중요한 도약대가 되었다. 베자는 1565년부터 1604년까지 40여 년 동안 총 9회에 걸쳐 신약성경 그리스어 본문을 출판함으로써 공인본문 최종 형태를 완성한다. 후대 개혁파 신학자들과 번역자들(특히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를 남긴 셈이다. 베자는 에스티엔 1550년 판을 기반으로 추가 수정을 한다. 자신이 소장한 사본 ‘코덱스 베자이(Codex Bezae)’와 ‘코덱스 클라르몬타누스(Codex Claromontanus)’를 참고한다. ‘코덱스’란 고대 필사본을 의미하며 두루마리(Scroll)와 달리 제본 방식으로 만든 책이란 뜻이다. 코덱스 베자이란 베자가 소장한 필사본을 말하며, 코덱스 클라르몬타누스는 프랑스 클레르몽(Clermont, 현재 클레르몽페랑)에서 발견된 필사본이란 뜻이다. 코덱스 베자이 곧 베자의 코덱스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포함하는 대표적인 필사본 그룹인 서방 본문(Western Text-type)의 필사본으로 주로 5세기경 작성되었으며 한쪽은 그리스어로 반대쪽은 라틴어 번역으로 병렬로 기록한 이중언어(Bilingual) 필사본이다. 그리고 코덱스 클라르몬타누스는 6세기경 필사되었다고 보며 오직 바울 서신서(로마서~히브리서/당시 히브리서의 기자에 대한 중론은 바울 사도로 보았음)만을 포함한다. 이렇게 베자의 편집본은 17세기까지 개혁파 전통에서 표준 신약성경 본문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베자의 9차례에 걸친 편집본 연구는 엘제비르 형제(Abraham & Bonaventure Elzevir)가 1633년에 출판한 ‘엘제비르 판본’의 공인본문(Textus Receptus, TR)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이들은 1580년대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출판업자 가문 출신이었다. 아브라함 엘제비르(Abraham Elzevir, 1586–1652)와 보나벤투라 엘제비르(Bonaventure Elzevir, 1583–1652) 두 형제는 프랑스에서 망명한 개혁파 성도 위그노(Huguenot) 출신으로 네덜란드 라이덴(Leiden)에서 출판업을 운영하면서 학문적으로 중요한 고전 문헌과 신학 서적을 인쇄했다. 특히 이들은 1624년과 1633년에 출판한 신약 그리스어 본문이 공인본문(TR)의 권위를 확보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리스어 본문 신약성경 1633년 판 서문에서 공인본문(Textus Receptus, TR)과 관련해 형제들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립(定立)했다.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이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인 본문을 당신은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엘제비르 1633년 판은 테오도르 베자(1598년 판)의 신약 본문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TR의 최종 형태를 확립하면서 기존 TR 계열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엘제비르 판이 출판된 후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를 신약 본문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엘제비르 공인본문 판은 서구 개혁파 교회에 성경 권위 확립을 위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경권위 정립을 위한 신약성경 공인본문 확정 과정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계시 과정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에라스무스(1516년~1535년)에 의해 최초로 인쇄된 신약 그리스어 성경 다섯 판본이 출판되었다. 이어서 에스티엔이 1550년 판을 출판함으로써 최초로-주석, 본문 비교의 작업을 통해-텍스트 비평 연구 방법이 도입된다. 베자(1565년~1598년 판)는 스테파누스 판본을 기반으로 하되 일부 수정하여 공인본문의 최종 형태를 완성하였으며, 엘제비르(1633년) 판본은 베자의 1598년 판을 바탕으로 공인본문(TR)을 확립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성경의 절대 권위와 성경 본문의 편집(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