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5-05-13 09: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예순여덟:고트족의 몰락, 중세 로마 가톨릭의 발흥


‘중세’라고 할 때 그 기준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부터 1000년경까지의 유럽 역사로 중세 고전 문화가 형성되는 시기를 일컫는다. 중세 초기는 정치적으로 분열의 시기였다.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유럽은 프랑크 왕국, 고트족 왕국 등으로 분열한다. 그러면서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이 확산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시간이었다. 로마 가톨릭이 유럽 사회를 종교적으로 지배하면서 점차 정치적 지배력도 확장한다. 고대 로마의 문화는 상당 부분 쇠퇴하고 농업 중심의 봉건 사회가 본격화한다. 그뿐 아니라 이슬람이 부상하여 중동,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럽과 충돌하는가 하면 문화적으로 큰 교류도 시작한다.

그런데 5세기 말 중세 초기 서유럽은 아리우스파 고트족(Arian Goths)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게르만계의 고트족은 주후 4-6세기경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인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스페인과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서고트족(Visigoths)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고트족(Ostrogoths)을 건립한다. 아리우스주의의 핵심 주장은 삼위일체의 부정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신조에 담겨있다. 이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따르게 된 것은 4세기 고트족에 기독교를 전한 울필라스(Ulfilas, 약311–383)가 아리우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서고트족에게 복음을 전한 주교이며 선교사로 고트어 알파벳을 창제하고 신약성경 대부분을 고트어로 번역했다. 이는 게르만어 권역의 최초의 성경 번역이었다. 그런데 그는 구약 성경을 일부만 번역하는데, 역사서 특히 열왕기 등을 의도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트족의 성향이 매우 전투적이어서 성경에 나오는 전쟁 서술이 그 민족들의 전투성을 자극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고트족은 자연스럽게 아리우스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삼위일체 신앙을 기본 신조로 하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아리우스주의를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하고자 함이었다. 스페인을 중심으로 수립된 서고트 왕국은 아리우스주의를 앞세워 로마 가톨릭과 대립하였으며,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은 아리우스주의를 통해 비잔틴 제국에 맞서게 되었다.

그런데 587년 서고트 왕국의 왕 레카레드 1세(Reccared I, 재위 586–601년)는 아리우스주의를 버리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유는 로마 가톨릭과 정치적·교회적 통합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589년 제3차 ‘톨레도 공의회’(Third Council of Toledo)를 통해 레카레드 1세는 ‘나는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아리우스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중심의 동고트족의 경우, 아리우스파였던 테오도릭 대왕(Theodoric the Great, 약 454–526년)이 통치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도 관용 정책을 펼친다. 그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를 통치한 가장 중요한 게르만계 군주 중 하나였으며 로마의 행정 체계와 문화 그리고 게르만 고트족 전통을 융합하여 고대와 중세를 잇는 전환기의 가교 역할을 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년에 로마 가톨릭 세력과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테오도릭 대왕은 ‘철학의 위안’으로 유명한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c. 480년-c. 524년 또는 525년)를 반역 혐의로 투옥·처형하고, 교황 요한 1세도 정치적 갈등으로 처형한다. 테오도릭 사후 후계자 아탈라릭은 어렸고 그 제위는 매우 불안정했다. 이 무렵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고트 전쟁’(535–554년)을 일으키고 동고트 왕국은 결국 약 30년 만에 소멸한다.

그 후 동고트족은 2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는다. 그런데 동고트족의 교회 통치권은 로마 교황청 지배 아래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비잔틴 황제와 라벤나 총독의 통제를 받았다. 종교적으로 보면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고 삼위일체 신조가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751년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라벤나가 함락당하면서 비잔틴 세력은 급속히 약화하였다. 당시 교황이었던 스테파노 2세(Stephen II)는 프랑크 왕 피핀(Pepin the Short)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피핀은 756년 이탈리아 중부(라벤나 포함)를 다시 탈환하고 그 영토를 로마 교황에게 기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 교황은 종교 지도자일 뿐 아니라 ‘세속 군주’의 지위까지 확보하면서 이른바 역사에서 ‘교황령(Papal States)’이라는 강력한 정치-종교적 권력을 개시하게 된다. 이 교황령은 중세 교황권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이후 800년에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Charlemagne)에게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시행하면서 중세 로마 가톨릭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로마 교황과 프랑크 제국은 동맹 관계를 확정하면서 비잔틴 제국에 대한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런데 고트족들이 삼위일체 신앙인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인 배경에는 먼저 정치적 통합의 필요성이 현상적인 큰 이유가 되었다. 로마제국 내에서 아리우스주의는 국가 분리주의적 성향으로 보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과 통합 여부는 결국 로마 가톨릭의 삼위일체 신앙을 수용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삼위일체 신앙이 ‘정통’이라는 주장에 고트족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그 교리의 논리성과 신학적 우월성에 설득을 당한다. 이렇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결국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c. 296 또는 298-373년), 힐라리우스(Hilary of Poitiers, c. 310–367년),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 c. 339–397)가 주도하는 서방 신학에 패배당한 것이다.

<274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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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술의 동력, 예술적 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