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편파적인 비판의 특성
2019년의 명절 전후에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나라에 정의가 없다고 서로 간에 외치고 있다. 한 법무부 장관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비판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이러한 일은 추석 명절과 연계되어 사람들의 관심만큼이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이면 관심사들을 끄집어낸다. 때로는 분위기를 위해서 별 관심이 없는 경우에도 대화거리로 올리기도 한다. 또 때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주제를 다른 데로 바꾸고자,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판적인 사건들을 크게 내놓기도 한다. 이로 인해 같이 있는 사람들이 듣기 싫고 때로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의 나라 환경과 가까운 주변의 환경들이 비판을 많이 쏟아 내고 있다. 특히 신문이나 언론들은 직업적으로 이런 비판을 많이 담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 앞에서, 분명하고 절대적인 비판의 기준들이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그것은 드러나서 비판받고 또 상대를 비판하는 것들이 너무도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한 국가의 삼권분립 곧 입법과 사법과 행정 등 그 기능의 빈약함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또 진실 규명의 중요성을 약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비판들이 많이 쏟아지는 경우에, 비판의 절대적인 기준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들이 되길 바랄 뿐이다. 한 검찰총장이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 의미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다주었다.
이번의 법무부 장관이 바뀌는 일련의 과정은 내년의 총선에 대소 간에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비판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생각과 평가가 가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표현적으로 정치적인 일을 언급하지만, 이면적으로는 한쪽으로 쏠린 비판의 특성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살피고 짚어보고자 한다. 이것은 서로서로 편이 되어 어느 한쪽에서 진실과 관계없이, 비판의 일변도로 치닫는다면 같이 큰 손실을 주기 때문이다.
첫째, 사실에서 동떨어진 과장성이 짙다. 사실 내지 진실 자체는 시간상으로나 공간적인 면에서 특히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하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한 사실과 진실은 절대자 앞에 있다. 절대자 곧 하나님에게는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에 해당하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 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이다. 사실은 동쪽에 있는데, 때로는 그 사실이 서쪽에 있는 것으로 판정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편파적인 비판들이 가져다주는 무서운 결과이다.
둘째, 들보로서 티를 보는 것과 같은 모순성이 강하다. 이것은 큰 약점을 가진 쪽에서 아주 작은 약점을 꼬집는 모순이다. 바로 어불성설이다. 여기서도 이번 일이 이와 같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쁜 말은 또 다른 나쁜 말을 가져온다. 비판자가 이미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자리나 각도에 있으면서, 어떤 것을 두고 바르게 보고 판단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편파적인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셋째, 비판의 기준이 약하여 비난성이 짙다. 비판의 기준은 사실이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할 때, 근거나 이유에 밀접하다. 편파적인 비난에 대하여 정당한 방어를 위하여 반박이나 비판을 할 수도 있다. 비판자의 관점이 편파적일 때, 비판을 하기 위해 비판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비판은 건전한 비판과는 거리가 아주 멀어진 비난이다. 정의로운 비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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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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