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가장 강하고 넓은 시야
개인의 편협(偏狹)된 소견으로부터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일 자체도 전체 속에서는 극히 부분적이다. 시각의 차이(a difference of viewpoint)는 당연하며, 시야(視野)의 대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각의 차이에 대한 대안은 성경밖에 없다. 인간들의 시각(視角)은 표면적으로 보면 얼굴의 생김새와도 관계있다. 얼굴의 생김새와 관계있다는 것은 눈이 앞면에 박혀 있고 귀는 옆에 달려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눈은 시간과 함께 한 쪽 방향밖에 볼 수 없다. 이에 비해서 귀는 네 방향이나 공간과 함께 입체적으로 들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의 시야(視野)는 너무도 제한적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너무도 제한적인 인간의 시야에 대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2020년 연말을 맞이하면서 세계는 좌우의 시각으로 크게 양분되고 있다. 우파와 좌파라고 외치는 소리들은 주변에서 쉽게 들리고 있다. 여기서는 좌파나 우파의 사상이나 관점을 논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이 주제와 크게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하나는 신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인본주의이다. 이 인본주의에서 더 작은 여러 가지의 시각이 있게 된다. 또 방법적인 면에서 시각의 차이가 나는 것은 각 사람이 보는 것이 전체인가 아니면 그 전체의 부분인가와 깊이 관련된다.
이런 시각과 시야의 문제는 결국 종교에까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학적인 체계에 있어서 가장 높은 단계가 종교이기 때문이다. “교(敎)”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물론 인문과학 안에 들어있는 종교학을 포함한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적인 기독교는 가장 강하고 입체적인 시야이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기독교 그 자체가 성경에 온전히 뿌리를 둘 때에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진정한 종교는 모든 학문을 포괄한다. 진정한 학문은 분명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영혼불멸설’이나 ‘음양오행설’ 등과 같이 불명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은 하나의 가설로 존재할 뿐이다. 성경에만 오직 근거해야 하는 기독교임을 강조하면서 몇 가지의 관점을 손꼽아본다.
첫째, 기독교 성경관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관을 증명하려는 그 과정에서 성경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신학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체계화를 이루고 있다. 이 체계 속에서 생명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하나의 체계로 연결되고 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기독교 성경관은 모든 관점의 근본적인 시각이다. 이 성경관으로부터 신관과 역사관 등이 모두 제대로 나올 수 있다.
둘째, 기독교 신관이다. 기독교 신관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소위 ‘삼위일체설’이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부자(父子) 관계는 상대적으로 쉽게 보이고, 성부와 성령 관계와 성자와 성령 관계는 더 어렵게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들추어내는 것에 강조를 두면서, 논점에 잘 접근하려는 자세에서 질문으로 구성해 본다. 그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이신가?’이다.
셋째, 기독교 역사관이다. 이론과 학문적으로는 대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History)로 수긍하고 인정하는 셈이다. 또 역사에서 중요한 B.C.와 A.D.가 실제의 인류사에 표현되고 있다. 문제는 이 역사의 주관자이다. 이론에서는 예수(하나님)가 모든 역사를 운행하시고 주관하신다고 주장해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 실정의 핵심은 각 개인의 생각의 중심에서 ‘과연 그렇게 알고 믿고 있는가?’이다.
넷째, 기독교 인생관이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와 아주 밀접하다.
다섯째, 기독교 세계관이다. 공간과 시간 등 중요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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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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