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세상에 치중하는 세상
세상은 광활하고 방만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2021년 하반기에 접어든 지금은 여러모로 조여드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사람을 바라보며 그 어느 집단과 손을 잡을까를 생각한다. 이것이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의 사람들이다. 이렇게 지내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어느 곳인가에 한정되고 그때의 시간들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숙명론이나 자유의지의 문제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공간과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평생 동안 끝까지 달라붙어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일생 동안 늘 함께하는 공간과 시간은 그 나름의 특성과 기능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그 존재의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끈질기게 끝까지 사람에게 따라오는 공간과 시간을 인간과 함께 들여다보고 싶다.
첫째, 공간에 치중하고 있다. 공간은 곳이며 땅과 바다와 하늘 등으로 되어 있다.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한 이래로 땅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에는 땅이라는 말이 대단히 많이 나온다. 거의 2,500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또 땅과 아주 밀접한 용어도 많이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곳과 지역 등이다. 애굽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등은 아주 유명한 지역들이다. 이 땅은 사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이 땅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땅’은 비록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신구약성경에서 의미상이나 논리상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의 땅은 역사서와 선지서에 많이 나온다. 시가서에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고 있다. 이것 자체가 구약성경의 내용상의 구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구약성경의 중심부에 있는 3大언약은 자손과 땅과 통치이다. 땅과 관계하여 성경에서 근거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부분이나 한정된 어떤 지역을 살펴서는 이 세상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Adam)이라는 이름은 땅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의 아다마(adamah; 흙, 대지)와 같은 어근이다. 아담은 남성형의 명사이고 아다마는 여성형의 명사이다. 이것은 공간과 인간의 밀접함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당연히 인간은 땅을 비롯하여 공간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땅에 치중하고 목숨을 걸고서 땅을 중심으로 하여 그 어떤 공간도 인간에게 궁극적이고 완전한 안식을 주지 못하는 점이다.
둘째, 시간에 치중하고 있다. 시간은 시기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힘은 한 마디로 역사의 힘이다. 개인사나 세계사에는 모두 이러한 역사의 힘이 들어 있다. 이러한 역사의 힘은 노하우(know-how)와 밀접하다. 이러한 세 시기에 비중을 두고 치중하는 것은 사람들 개인마다 각자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머무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에만 몰두하여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지도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는 없는 것으로 하고 오로지 미래의 상상(想像)에 놀기도 한다. 계절 중에 어느 계절을 좋아하나? 이러한 질문은 사람의 생활 속에 늘 자리 잡고 있다. 어디에 여행을 가고 싶나? 이런 질문도 하나 안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가지고 있다. 인간들은 일찍이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 앞에서 진실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큰 설득력 앞에 인간들은 굴복하여 시간의 힘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시간의 힘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의 이론들이 뒤따라올 수 있었다. 그중에서 크게 강조된 점이 아마 윤회(輪廻)일 것이다. 시간의 위력이 너무 크게 인간들에게 닥쳐왔기 때문에, 그 시간에 대하여 회피하여 결과적으로 도달하게 된 종국(終局)일 수도 있다.
셋째, 인간에 치중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인주의는 더 심화되어 가고 있다. 성경의 인간사에서 다윗과 사울은 유명하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큰 비중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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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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