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걷는 것은 왜 중요한가?
사람은 인문(人文)이다. 인(人)이나 문(文)은 모두 사람 모습이다. 바로 직립(直立)의 모양이다. 글도 그 사람의 모습이며 표현이다. 문화(文化)도 사람이며 삶이다. 2022에서 제일 앞의 2가 가장 값지고 중요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시편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편)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70이나 80은 모두 걸어온 발자취이다. 100세 시대라고 외치지만, 1000년(millennium) 앞에서는 도토리의 키들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온 광야의 길은 걸음의 길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그들에게 구름과 불이 없는 길은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는 난관 그 자체이다. 이 상황은 신약시대의 성도가 걷고 있는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은 착각의 명수다. 어제저녁 자고 오늘 아침 일어나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2022년 9월까지 70여 년 왕(王)으로서 자리하다가 100세 가까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서도, 대부분의 나라는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안목 등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일생(一生)은 한 사람이 평생 걸어온 발자국이다. 지난달에, 지금 뉴스에 잘 나오는 정치인들이 출입할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걸음걸이 흉내들을, 우습게 지켜보았다. 걷지 않을 수 없는 인간에게 각자의 걸음걸이는 달라붙어 있다. 걷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에게 이 걸음이 중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만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유다. 인간의 특성에서 직립보행(直立步行)은 빠질 수 없다, 인간의 직립보행(直立步行)은 참으로 중요하다. 기어 다니는 벌레나 네 발의 짐승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다는 의미 속에는, 머리가 하늘을 향하는 것과 더 나아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 등이 들어 있다. 서는 것은 표면적으로 발바닥만 땅에 닿고 있다. 인간은 땅과 하늘 사이에 존재한다는 천지인(天地人)을 대개 감지하여 생각하면서 움직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얼마간을 서 있으면 앉고 싶어진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서는 것은 기본적으로 앉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며 희망적이다. 벌(罰) 받거나 세울 때, 서 있는 것도 한 형벌이 되지 않는가? 서고 앉는 것은 문화의 필수이다. 서고 앉는 위치(자리)를 분별하는 것도 인간의 문화수준과 밀접하다. 인간이 인문이기 때문에, 문화는 달라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비만이 지금처럼 문제가 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21C에 따라온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건강하게 잘 살려고 몸부림치며 사는데, 원하지 않게 몸이 불어난다. 살이 많이 찌는 것을 병이나 단점에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비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건강하고 알맞게 자신의 몸을 유지하면서 생활하고자 함에도 왜 잘 되지 않는가? 육체는 정신과 연결되어 있어 결코 따로 떼어내어 분석될 수 없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뇌(右腦) 운동 때문이다. 우뇌는 공간성을 인식하는 것과 아주 밀접하다. 2022년 9월에 축구선수 손흥민이 후반에 투입되어 15분 만에 3골을 넣었다. 손흥민 선수의 뇌를 분석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공간 인식에 민감한 것은 분명하다. 지혜롭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뇌에 더 밀접하다. 이것은 좌측의 뇌(腦)에 비해서 우뇌(右腦)와 더 밀접하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있을 것이다.
셋째, 좌뇌(左腦) 운동 때문이다. 뇌(腦) 운동은 21세기에 접어들어 점점 더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오고 있다. 21세기에 처하여, 인간 개인으로서의 필자가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世乭)의 대결이었다. 이 계기가 빅(Big)데이터 내지 인공지능 등에서 큰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좌뇌를 사용하는 것은 시간성과 상대적으로 더 밀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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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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