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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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5-24 09:1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我田引水式의 성경인용


아전인수(我田引水)는 자기 밭에 물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해석이다. 아전인수적인 생각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이 자체는 비판될 수 없다. 한편으로 무한히 비판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 66권을 가지고 아전인수식이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사용하거나 인용하는 것은 너무도 보편적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뚜렷한 중심을 잃고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되어진다. 곧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위 제목은 분명한 주제가 없을 때에, 이현령비현령의 현상이 잘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면, 결코 이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너무도 큰 착각(錯覺) 속에서 성경말씀을 난도질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말씀은 인간의 몸처럼 머리부터 발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당연히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용이나 활용에서 원래의 생명체에서 분리되어 이탈되면 바로 죽은 것이다. 성경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죽을 수 없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活力이 있어 左右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魂과 靈과 및 關節과 骨髓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와 같이 모든 생명과 힘의 근원이다. 여기서는 21세기인 지금도 우리 생활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보이는 잘못된 성경인용 양태를 다섯 손가락처럼 나누어 분석하여 비판한다.
첫째,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구약성경의 주제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이시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 구약성경 39권은 마치 사지(四肢)와 오장육부(五臟六腑)처럼 결합되고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원리나 이치를 오해하여 착각하고 있으면, 당연히 아전인수식으로 또 철학적인 사상으로 인용하고 활용할 수밖에 없다.
둘째, 신약성경을 인용한다. 신약성경의 주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를 무슨 관계로 또 유기적으로 볼 것인가?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문제 제기 차원에서 강조해 두고 싶다. 신약성경은 마치 사람의 머리통처럼 입체적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두개골(頭蓋骨)은 왜 강하고 견고해야 하는가? 속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4복음서는 마치 머리통의 이목구비처럼 강하고도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4복음서 각각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이목구비로서 비유해 본다. 귀는 직임이나 직책을 상징한다. 눈은 신분이나 지위를 상징한다. 입은 노동이나 국사(國事)를 상징한다. 코는 본성이나 생명을 연상시키고 있다.
셋째, 66권 중의 하나를 인용한다. 66권 중에서 아주 많이 인용되는 것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각각 하나씩 부각시킨다. 그것은 욥기와 마가복음이다. 욥기의 “너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생활 주변에서 아주 흔히 보인다. 마가복음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기도가 명사로서 처음 사용된 곳이다. 마가복음 9장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 “기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참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밝혀주려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부터 비뚤어져 나가서 결국 어디까지 이르게 될 것인가? 기도는 만병통치약으로까지 둔갑되었다.
넷째, 몇 구절을 인용한다.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몇 구절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제시한 대로, 욥기와 마가복음은 문답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다섯째, 한 절을 인용한다. 핵심적인 단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여 활용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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