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스라엘(以色列)
팔레스타인(블레셋) 지역에서 2023년 10월에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제치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스라엘(Israel)을 중국에서도 일찍이(數百年前) “이스리에(以色列)”로 표기해 오고 있다. 이 이스라엘 나라를 조성하시고 2023년까지 섭리를 하신 분이 있을까? 그분은 바로 세계 역사의 주관자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강요하거나 주장하려고 이 글을 적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인의 편협(偏狹)된 소견으로부터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일 자체도 전체 속에서는 극히 부분적이다. 시각의 차이(a difference of viewpoint)는 당연하며, 시야(視野)의 대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각의 차이에 대한 대안은 공의롭고 분명한 기준밖에 없다. 인간들의 시각(視角)은 표면적으로 보면 얼굴의 생김새와도 관계있다. 얼굴의 생김새와 관계있다는 것은 눈이 앞면에 박혀 있고 귀는 옆에 달려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눈은 시간과 함께 한 쪽 방향밖에 볼 수 없다. 이에 비해서 귀는 네 방향이나 공간과 함께 입체적으로 들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의 시야(視野)는 너무도 제한적이다. 2023년의 이 큰 전쟁에 직면하여, 세계는 좌우의 시각으로 크게 양분되고 있다. 우파와 좌파라고 외치는 소리들은 주변에서 쉽게 들리고 있다. 여기서는 좌파나 우파의 사상이나 관점을 논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이 주제와 크게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하나는 신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인본주의이다. 이 인본주의에서 더 작은 여러 가지의 시각이 있게 된다. 또 방법적인 면에서 시각의 차이가 나는 것은 각 사람이 보는 것이 전체인가? 아니면 그 전체의 부분인가와 깊이 관련된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을 비교할 것이다. 한 부류는 이스라엘이 하마스보다 더 좋은 나라로 여길 것이다. 또 다른 부류는 하마스보다 이스라엘이 더 잔인무도(殘忍無道)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이 과연 올바르고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바로 이 글을 적는 목적이다. 이 목적에 관심을 두면서, 이스라엘 나라를 역사적인 사실에 주안점을 두고 세 가지로만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12지파 중심의 나라다. 이 “이스라엘”은 인명과 지명에 다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로부터 형성되어 왔다.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대로 열거해 보면 아래와 같다. 1은 르우벤, 2는 시므온, 3은 레위, 4는 유다, 5는 단, 6은 납달리, 7은 갓, 8은 아셀, 9는 잇사갈, 10은 스블론, 11은 요셉, 12는 베냐민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게 분배할 때는 이것과 약간 달라진다. 레위지파는 18개의 성읍을 받고 제외된다.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다.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12지파에 들어오게 된다. 요한계시록 7장에는, 유다지파를 선두로 하여 한 번씩 제외되었던 레위와 요셉이 들어오고 단과 에브라임은 제외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12지파는 유다지파부터 베냐민지파까지다.
둘째, 예루살렘 중심의 나라다.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 명칭은 여호수아 10장에 처음 나타나 있다. 예루살렘은 고대에 가나안 사람의 수도였으나 후에 다윗이 점령하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고, 그 아들 솔로몬은 40년 동안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 예루살렘 명칭은 예레미야(애가)서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예레미야서(애가)서의 주제는 예루살렘에서 뽑았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심으심이다.
셋째, 2,000여 년 만에 1948년 5월에 ‘이스라엘’은 세계지도(地圖)에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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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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