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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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7-03 06:5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되리라’와 ‘~되라’의 간극(間隙)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장 8절/개역성경)
일반적으로 전통 교회에서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연합회나 전도회 주관 헌신예배를 관행처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헌신예배 설교 중 사도행전 1장 8절을 인용하여 ‘지상명령’이라는 제목 설교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성경 본문 하반 절을 보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는데, 이를 많은 설교자들은 ‘내 증인이 되라’로 잘못 이해하여 인간이 복음 전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릇된 설교를 한다. 약속의 말씀인 ‘되리라’를 명령형 ‘되라’로 심각한 오독을 지금도 반복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되리라’와 인간이 주체가 되는 ‘되라’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되리라’와 ‘되라’를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되리라’는 동사 ‘되다’의 어간 ‘되-’에 화자의 추측을 나타내는 어미 ‘-리-’가 ‘-라’와 결합하여 ‘될 것이다’와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되라’는 어간 ‘되-’에 명령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라’와 결합하여 명령형을 만들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올바른 성경해석의 중요성은 매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올바른 해석은 반드시 성경 전체 구조에 따라 해석해야 하므로, 이러한 해석 원리 하에 사도행전 1장 8절의 바른 해석과 그 뜻을 살펴보려고 한다. 성경 전체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기록이며,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 성취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신구약 성경 안에서도 언약과 성취 구조가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1장 8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구조적 연관성을 찾으려 한다.
요한복음은 사도행전 1장 11절까지 이어지는 사건으로, 예수께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그리스도의 본성(本性)인 신성을 중심으로 증거하신 내용이다. 즉 본래 신성이신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육신을 입으시고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내용과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하여 다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시는 역사의 사실 기록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는 마지막 기록이 사도행전 1장 11절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사도행전은 1장 12절에서 28장까지 강림하신 성령께서 교회설립 사건을 통해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항상 교회의 통치자이심을 증거하는 기록 내용이다. 사도행전을 요약하면 성령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교회설립을 통해 성취함으로 증거한 내용으로, 예루살렘 교회설립을 비롯해 이방지역 교회설립과 로마교회 설립 경위가 잘 나타나 있다.

본문을 중심으로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 먼저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5절까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한의 물세례와는 달리 머지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내용이고, 1장 6절에서 8절까지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여 그들이 권능을 받도록 하셔서 예루살렘을 비롯해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언약이다. 그러므로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지상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드러내신 예언의 말씀이 분명하다. (앞의 내용은 ‘진리의말씀사’가 발행한 박용기 목사의 ‘성경강론 14권과 15권 중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주석을 참고 바람) 그러므로 ‘되리라’와 ‘되라’의 의미의 간극은 극과 극이다. 문해(文解)에서 기본 중 기본은 주어와 서술어의 분명한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주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얼마나 그 글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와 직접 관련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주로 제목 설교를 한다. 여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성경 본문의 그릇된 인용과 해석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성경 전체를 구조적 통일성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주어가 목회자나 내가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는 과거 신앙의 선배들보다 훨씬 발달한 문화와 문명을 누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다양한 정보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성경 주석의 그릇된 해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정말로 유의해야 한다. 혹은 자신의 인생 경험이나 위인들의 삶을 덧붙여 불교의 설법이나 도덕적 교훈처럼 제목 설교를 하는 것은 더더욱 삼가야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구절 한 구절 성경 전체를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따라가면서 본문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도행전의 바울처럼 강론(사도행전 17:2, 18:4, 19:9, 24:25)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되라’와 ‘되리라’의 간극을 보더라도 과거 우리가 성경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최근 한국교회 문제의 대안으로 성경 교사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과거에 머물러 있어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성경 교사들이여! 오류가 난 첫 단추를 다시 풀고 처음부터 다시 끼워보는 심정으로 성경을 성경대로 보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중보’의 오용(誤用)
바람을 몰고 다니는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