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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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10 20:3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장례식의 큰 두 의미


“YS의 화해-통합 정신 개신교도 꼭 배워야죠”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관예배를 집례한 고명진 목사와 문답형식으로 나눈 글이다(2015년 12월 14일 동아일보 A25면). 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2015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종교의식이었다. 나라의 정치는 장례 정국과 같은 분위기였다.

본 위원도 작년 5월에 어느 목사님의 부친장례식장에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또, 여름에는 친구 집사님의 모친상에 장지까지 동행하여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2월 초에는 위 세 경우와는 달리 사십 대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고 장례식장에서 기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마음은 어떠한가? 본 위원은 고등학생 시절에 돌아가신 형님이 사 주신 옷을 지금까지 겨울에 집에서 입는다. 그 옷이 따뜻하고 질기기 때문이다. 형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문득문득 이러한 생각이 스친다.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성경만이 선포하고 있다.

성경은 장례식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think about death)고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문턱에(at death's door) 있기 때문이다. 장례식에서 마음이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와 이미 죽은 자의 사이에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마음이다. 살아 있는 자는 마음이 있고, 이미 죽은 자에게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이러한 것은 시편과 잠언 전도서를 참고할 수 있으며, 특히 본보 4면의 전도서강론에 자세하다). 이렇게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을 중심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간략히 분석한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살았다’와 ‘죽었다’이다.

장례식이 갖는 하나의 의미는 ‘살았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과 같은 곤궁에서 벗어났을 때 ‘이제 살았다’라고 외치거나 마음속으로 크게 안도한다. 장례식의 내면이 지니고 있는 ‘살았다’와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이제 살았다’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 근본적인 차이는 영(靈)의 문제이며 영원이다. 이제야 살아났다는 것은 영원에서는 순간이며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의 근본인 영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며 존재임을 확증하지 못하게 되면, 늘 순간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되고 그것에 따라서 자신이 좌지우지된다. 육신을 지닌 자와 벗은 자 모두에게 참다운 생명은 영이다. 육신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도 “알면 살게 되고 모르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육신을 벗은 자는 살았다고 할 리가 없다. 육신을 가진 자가 정말 살았다고 할 때, 그것은 죽음에서 살아났음을 의미한다.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 의미이다. 인간 자기의 정체성이 주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죽었다’이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라고 강한 어조로 살아 있다고 하는 이들에게 던져 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다는 이성이다. 중생한 이성이 없는 것은 죽기 위하여 난 짐승과 같다. 요한계시록에도 이런 차원에서 사람의 수를 짐승의 수와 동일시하여 666을 선포하였다. 참으로 살아 있는 영이 죽을 리가 없다. 살려 주는 영 안에 참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장례식에서 ‘죽었다’는 것은 육신을 벗어나 참 생명으로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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