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24-01-16 17: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영적 세계에 답이 있다


2023년의 전쟁은 2024년에 들어와서도 지속되고 있다. 인간세계는 경쟁상대를 없애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영적 세계에 대하여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최초에는 언어(口音)가 하나였다. 21세기에 자료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더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비교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더 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영(靈, spirit)은 너무 신비롭고 어렵다.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이 영에 접근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端緖)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노아시대의 홍수와 직결된다.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큰 증거를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 엘리야를 통하여 큰비를 내린 것도 같은 맥락의 증거다. 한자어 “靈”자는 그 자체로 큰 빗방울이 내리고 있는 것을 형상으로 묘사하였다. 어떤 이들은 영(靈)자 안에 있는 입구 세(口口口)자를 두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해석하였다. 이런 식은 영이나 영적 세계에 접근하는 데 큰 장애물을 놓아두는 셈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숫자로 나타내면 벌써 영적 세계에 더 혼미하게 된다. 하나의 영(靈)을 아주 강조한 곳이 바로 고린도전서이다. 이 비(雨)는 무지개와 연결되며 더 나아가 전기(電氣)에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물과 불은 그 양태에서 크게 다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불은 아래에서 위로 번진다. 영이 임하는 것과 또 영의 활동은 권세와 영광에 결부되어 있다. 영문 spirit에서 “pi”는 마치 빗소리와 같다. 영적 세계에는 참 권세와 영광이 있다. 진정한 권세와 영광이 없는 세계를 세 가지로 분석하면서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세계에는 답이 없다. 인간 자체에 영원한 생명이나 생존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사는 전쟁사나 다름이 없다. 모든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이 참 권세다. 온 세상은 패권(覇權)을 잡기 위해 달려왔고 또 달리고 있다. 가인도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욕과 불만이 동생을 죽이게 되었다. 자기 개인의 불만이 가까이로부터 먼 곳까지 폭력을 보내게 된다. 폭력 자체의 중대성보다 오히려 이러한 불만이 더 심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 간에 보이지 않는 불만이 상처나 살인 등을 가져준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자체에서 완전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세계의 본질이 영적인 생활로 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움이나 폭력은 항상 함께 내재 되어 있다. 여기서 하늘로부터 오는 진정한 영적인 만족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둘째, 공간세계에는 답이 없다. 인간세계는 공간에 갇힌 세계다. 세계는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형통한 것은 트이는 것이고 곤고한 것은 막히는 것이다. 막히고 트이는 것은, 그 본질 면에서 영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의 길은 막히고 트임의 연속이다. 홍해 바다의 막힘을 성경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처지가 얼마나 많았던가? 소위 말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2024년 연두에도 가자지구의 사면초가는 심각하고 혹독하게 형성되어 있다. 우리 인간들은 인간세계인 공간세계에 함몰되어 버리면, 섭리라는 영적 세계를 확인하여 확증할 수 없다.
셋째, 시간세계에는 답이 없다. 공간세계는 시간세계와 밀착되어 늘 붙어 있다. 시편 중의 시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라는 노래는 진리로서 못처럼 박혀 기록되어 있다. 이 시간세계에 있어서 이 시간의 본질을 잘 간파하는 것이 바로 지혜다. 인간과 공간과 시간 등을 통하여 진정한 생명을 만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신들의 영이다. 다니엘의 안에는 근본적으로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었다. 그 신들의 영은 바로 성령이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과거부터 미래까지
진정한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