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25-06-24 09: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2)

banner

banner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사도행전 17:22–23 개역성경)

현대 올림픽이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앞서 그리스, 로마 문명의 정신세계가 우리 곁에 가까이 와서 공존하고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바로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체전이다. 대부분 국민들은 자국 선수들의 불타는 승부욕과 열정에 열광한다. 유년 시절부터 축구와 청소년 때는 배구 운동을 좋아했고, 스포츠 관련 직장을 오랫동안 다니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 고대 올림픽의 발생지인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Heraion) 앞에서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불 성화(聖火)의 채화(採火) 장면을 무심코 지나쳐 버린다. 또한, 지구촌 시민들은 고대 그리스 여사제 복장을 한 여성이 주도하는 전통적인 의식으로 진행되는 채화 장면에 매혹된다. 고대 그리스 여사제 복장을 한 여성이 주도하는 이 전통적인 채화 의식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주관하며, 의도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전통을 재현하고 있다. 이는 현대 올림픽이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고대 헬레니즘 문명과 그 가치관을 계승하는 문화적 의례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화가 개최국 주경기장 성화대에 점화되는 그 황홀한 순간에 박수와 함께 스포츠 행사를 즐기기 전에 기독교인이라면 이와 같은 제례적 성격의 의식이 지닌 문화적·종교적 함의(含意)에 대해 한 번쯤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 건축의 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전 세계 시민들의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든 그리스·로마 문명과 그들의 일상에 밀접하게 연결된 종교 생활, 예술 세계의 중심에 있는 종교 건축, 그리고 이를 동반하는 다양한 생활상을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려 한다. 먼저, 그리스 문명의 기원과 이들의 종교가 예술과 일체를 이루었던 당시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그리스의 여명기

그리스는 기름진 평야와 거대한 강(江)도 없는 나라이다. 국토의 75% 이상이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산악국가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지형적인 조건에서도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찬란하게 문명을 이룩하고, 현대인에게 다양하고도 풍부한 유산과 문화적 영향을 남길 수 있었을까?
기원전 2000년경 현재의 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그리스 본토와 지중해의 에게해 지역은 서아시아 문명에 영향을 받은 청동기 문명, 즉 에게 문명이 번성하였다. 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과 해상 무역으로 크레타 문명은 전성기를 누렸다. 크레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크노소스 궁전(Knossos Palace)은 그리스 크레타섬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로, 미노아 왕국의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궁전은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청동기 시대의 궁전 중 하나로, 복잡한 일천오백여 개에 가까운 방이 있는 미궁(迷宮) 구조와 정교한 설계는 고대 문명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또한, 섬세한 금은 세공품과 도기 등이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크레타 문명은 서구 문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집트 문명과 같은 종교적 정치적 권위주의 문명과는 달리 자유롭고 활달한 개인주의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기원전 1400년경 미케네인(Mycenaeans)들이 현재의 그리스 본토에서 남하하여 에게해 지역을 점령하면서 크레타 문명을 흡수하였다. 이들은 크레타의 고유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들의 전사적이고 귀족 중심의 문화를 융합시켜, 보다 발전된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을 형성하였다. 이 문명은 크레타 문명의 예술적이면서도 해양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더 군사적이고 성곽 중심적인 특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번영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12세기경 그리스 북쪽 도리스 지역에서 철기를 사용하고 문명과 동떨어진 도리아인(Dorians)이 침입하면서 미케네 문명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결국은 몰락하게 됐다. 이러한 것에 대해 과거에는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급작스러운 정복이 아닌 점진적인 이주 또는 문화적 변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침입과 함께 고대 그리스가 일시적으로 문명적 후퇴를 겪는 기원전 약 1100년부터 800년 사이를 ‘그리스 암흑시대(Greek Dark Ages)’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이 시기는 문자 사용이 중단되고, 도시 국가 체제도 붕괴된 혼란의 시기로 변해 버렸다.

도시국가 ‘폴리스(πoλιc, polis)’가 탄생되다

미케네 문명은 도리아인의 침입이나 내부적인 문화 붕괴로 인해 기존의 왕국 체제가 무너졌다. 이로 인해 귀족 집단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공동체들이 형성되었고,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페니키아 문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그리스 문자가 등장하였다. 또한 청동기 대신 철기가 사용되면서 무기와 농기구의 질이 향상되어 생산성이 증가하였다.
그리스 본토는 산악 지형이 많고 평지가 적은 특성으로 인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로 해안가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도시 단위로 생활하게 되었다. 본토에 거주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외부 침입자들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언덕 위에 성과 신전, 그리고 군사적인 요새(要塞)를 세우고 정착 생활을 하였다.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00년경, 암흑기의 종료와 함께 작은 단위의 도시들이 발달하면서 독특한 형태의 도시국가인 ‘폴리스(πoλιc, polis)’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리스 알파벳 문자의 사용, 도시 공동체(폴리스)의 형성, 무역의 재개, 인구 증가, 예술과 건축의 발전 등 새로운 문명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는 지중해, 흑해 연안, 그리고 그리스 본토 전역에 걸쳐 수백 개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각기 독립된 국가로 성장하였고, 외부 민족의 침입 시에는 ‘헬라’라는 동족 의식을 바탕으로 연합하여 함께 맞서 싸우기도 했다. 폴리스는 일반적으로 도시의 높은 언덕(ἄκροc, akros)에 자리한 ‘아크로폴리스(Akropolis, Ἀκρoπολιc)’와, 시장이자 정치·문화 활동의 중심 공간인 ‘아고라(ἀγορἀ, agora)’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방어, 종교(신전), 그리고 도시의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는 핵심 장소였으며, 전쟁이나 위급 상황 시 시민들이 피신할 수 있는 요새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 국가의 중요 재산을 보관하기도 했었다.
반면 비교적 낮은 장소에 있는 아고라는 시민들이 모여 정치적 회의, 상업 활동, 사회적 교류를 펼치던 공공 광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 공동체가 정치·상업·사회적 활동을 수행하는 중심 무대였다. 이곳에서는 여성의 출입이 제한되었고, 주로 외부 활동이 자유로운 남성 시민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다음 호에는 도시국가 폴리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 도시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신전의 구조와 아고라에서 그리스인들의 생활을 탐구해 보려고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