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원어 성경과 원문비평
그동안 원어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몇 가지 나누었다. 앞으로 세 가지를 더 다루려고 한다. 원문비평과 종교개혁 그리고 훈민정음에 관련해 원어 성경을 살피려고 한다. 이어서 원어 성경 자체를 개론과 석의 형식으로 그 성경신학에 발맞추어 기초부터 밝혀서 증거하려고 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우리말로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 그 속뜻이야 저마다 달리 받고 이해하니 갑갑하다. 고전들 특히 성경 같은 절대 권위 책을 다룰 때 크게 조심해야 한다. 의미를 분석하여 성경신학도 세웠는데 하물며 원어야 오죽하겠는가? 오늘날도 랍비와 서구신학이 원어학을 주름잡는데 말도 않 된다. 우리가 언제 까지 외국 원어학에 쩔쩔매겠는가?
비평이라는 말이 눈에 거슬린다. 부패한 이성주의의 산물이다. 어리석은 문학 사학 철학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런 소리에 현대 젊은이가 여지없이 휩쓸린다. 원어 성경도 이런 개념과 방식으로 더럽혔는데 가깝게는 벌써 400년 동안이 넘는다. 이제는 모든 신학과 강단에서 알게 모르게 비평신학이 넘실거린다. 원어 성경이 먼저 산산 조각났고 번역 성경에서도 이미 끝장났다. 이제는 세계 단일 성경을 벌써 마련할 만큼 사탄이 성경을 무너뜨리려고 광분한다. 너무도 은밀하고 그럴싸하게 속이기에 대부분 모르고 속수무책이라. 그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구호만 힘없이 나부낀다. 이런 때 전통 원어 성경을 제대로 이어받아야 한다.
원문을 사람의 이성으로 인문학 같은 세상 요소를 가지고 새롭게 뜯어고치는 일이 원문비평이다. 현대개혁신학도 거의 다 물들었다. 유학을 간다고 야단법석 해도 학위를 따려면 원문비평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러니 강단에서 겉으로 복음을 말하고 예수스를 흐리스토스로 증거한다 해도 그 바탕을 따져야 한다. 비평한 원어를 가지고 다가설 때 누가 분별하겠는가? 유대학을 내세우고 최신언어이론을 깔고 현대인에게 제시할 때 누가 반박하겠는가? 그나마 정통교리를 가지고 변증한다 해도 변질된 원어 성경관으로 디밀 때 쪼그라든다. 에덴의 동산에서 첫 사람들이 벌써 원문비평으로 언약을 파괴했는데 우리야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원어 성경들을 보면 본문 글자들 말고 여러 표시들을 여러 가지로 덧붙였는데 모두 비평행위이다. 개혁자들이 다룬 원어 연구를 비평이라고 말하면 자유주의 비평신학이랑 혼선을 일으키니 조심하자. 원본이 없어졌고 사본만 두신 섭리를 잘 안다면 넉넉히 분별한다. 모음부호와 강세, 각종 문장부호를 원문에 사람들이 덧붙였는데 이것을 눈여겨보자. 이미 그런 표시들에 해석과 신학이 들어갔다. 이런 짓들이 성경해석을 제한하기에 원어를 본다고 해도 이런 온갖 덧붙임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 먼저 유대주의에서 랍비들이 비평작업을 선보였다. 하지만 계시종결 뒤에 교회가 처음 부터 보존한 전통 원어 성경을 섭리 가운데 간직한다.
헤브라이즘이던 헬레니즘이던 온갖 사조와 풍조에 물들어서 지식분자들이 성경도 세상책 처럼 다룬다. 사람이 판단하여 성경기록을 뜯어고친다. 세상과 사람의 구미에 맞춘다. 정치경제 론리에 빠져서 두 마음을 품는다. 세속 언어이론을 도입하여 겉모양만 바꾸어서 계속 덧칠하는 게 원문비평학이다. 빗나간 성경해석의 결과로 흐리스토스를 엉터리로 가르쳐 망하게 한다. 성경절대권위를 성령님이 은혜로 받아들이게 하셔야 원어 성경을 원문비평으로 다루지 않는다. 신학이 신앙과 일치하는데 성경과 믿음을 달리 생각하는 게 성경비평이다. 거짓 신학으로 성경해석한 것으로 원어 성경을 비평하니 옳바른 해석원리가 너무도 중요하다.
구약비평과 신약비평이 서로 얽혀 있다. 히브리어를 랍비들이 주름잡는다며 설치고 헬라어야 서방언어의 원조격이니 서구신학이 틀어쥔다. 여기에 로마 가톨릭이 라틴어로 속여서 원문비평에서 큰손이다. 거짓된 비평작업으로 성경을 왜곡시키면 예호바를 정통으로 못 받게 하기에 사탄이 거짓선생들을 부추겨 속인다. 현대히브리어와 유대학을 통해서 덤비기도 하고 고전헬라문학 따위를 앞세워서 성경절대권위를 무너뜨린다. 원문비평이 세상 모든 분야에 붙어있기에 사탄이 온 세상을 꾀는 수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전통 원어 성경 자체로 성경권위를 변증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철저히 이어받아 계승시켜야 한다.
교의학이 변질했고 제자리걸음인 까닭이 무엇보다 원어 성경에 대한 빈틈이다. 앙상하고 메마른 상태이니 교조주의로 흐른다. 성경에 무지하니 사람의 철학만 나부낀다. 스스로 원어 성경을 다루어 원문비평을 막아서 이겨야만 교의학이 살아난다. 신학이 제자리를 잡는다는 말이다. 성경이 무너지면 신학이 어디에 서겠는가? 그럴싸한 학문용어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부패성에 호소하기에 원문비평은 철마다 옷 갈아입고 당근과 채찍으로 유혹한다. 원어문법책, 성구사전과 원어사전, 신학사전, 각종 주석 따위들로 겉보기에 철옹성을 구축했다. 원어 성경을 가르치는 자세와 방법에도 여러 미끼로 덫을 놓았으니 백척간두에서 사면초가라.
크리티쿠스 아파라투스, 콘코르단티아 같은 말로 혹세무민한다. 교리학 부터 성경해석학 까지 신학 모든 분야를 원문비평이 석권했다. 안심하고 추천할 책이 않 보인다. 16세기 교회개혁 이후 다시 금방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예리하게 분별하는 사람이 적다. 원어 성경을 내세우되 원문비평을 슬며시 깔고 공격하는데 정통신학인들 어찌 배겨나겠는가? 비평신학에서 정통신학을 무시하는데 성경을 껍데기만 붙들고 무식하다고 비웃는다. 성경으로 신학을 새롭게 세워야한다. 원어 성경을 통해서 신학개혁의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가 그 성경신학을 세웠는데 원문비평을 철저히 물리쳐야 한다.
원문비평학을 사본학이라고도 한다. 그 말이 그 말인데 말장난이다. 들여다보면 사본들이 나오고 억지로 이름붙이고 그 번호들이 나오고 언셜이니 파피루스니 하면서 문자를 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만 아니라 독일어와 영어도 모자라서 라틴어로 종결짓는다. 무지랭이가 보면 대단하게 보이지만 아이들 소꼽장난이다. 그 근거를 말하는 자리가 아니지만 분명한 하나는 우리 배달말이 언어 중 유일무이한 최고언어라는 것만 말해둔다. 사본 갯수가 지난 500년을 돌아보면 갈 수록 늘어난다. 그것으로 엉성한 론리를 앞세워 순수원본에 가깝게 만든다고 속인다. 믿음이 바른 사람은 단박에 거짓 술수임을 안다. 가경과 외경은 또 뭔가?
이런 말들을 뒤좇다보면 인생지사 일장춘몽이라. 문서설 부터 고고학 따위로 원어 성경을 란도질했다. 곱상하게 구조주의니 뭐니 하면서 자꾸 세상 리론 따라 진리로 장사한다. 결국 성경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든다. 현대신학이란 이렇게도 심각하게 변질했다. 현재 하나님 앞에서 소개할 신학교가 있으면 말해보라! 원문비평이 이렇게도 모든 방면 속에서 공격한다. 이런 때 그 성경신학 같은 신학원리로 성경을 밝힌다는 게 땅불쑥한 은혜이다. 물론 더 가다듬고 덧붙여서 연구하여 확인할 부분이 있다고 해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무엇을 계시하는가 밝힌 것이기에 전통 원어 성경으로 연구하여 확증한다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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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리종연 목사 (서울진명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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