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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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12 21:4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하나님은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왜 사람을 지으셨을까’하고 물어보면 장로교 교인들은 대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드셨다”고 대답한다. 아마도 그것은 소요리문답 제1문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제1되는 목적이라고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너무 피상적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사람이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영광되지 못하시는가?
또한 이런 의문도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꼭 지으실 필요가 있으셨는가?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외로우신가?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우연인가, 필연인가? 만일 하나님의 창조가 필연이라면 하나님은 절대자일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 곧, 천지창조나 인간 창조가 꼭 필요했다면 그 창조주는 피조물이 없으면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충만이라는 말은 본래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차고 넘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동등한 인격체 사이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쏙 빼닮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다. 이때의 인격체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강요된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스스로 선택하여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도 이런 인격체로 지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나님은 본래부터 소그룹으로 계셨다. 하나님은 소그룹공동체로 계셨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충만한 사랑 가운데 함께 계셨다. 아무것도 없어도, 무한하고 충만한 사랑 가운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만족하고 비할 데 없는 행복한 삶을 누리며 계셨다. 왜 하나님은 소그룹공동체로 계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택하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하나님은 왜 三位였을까? 그것은 공동체의 가장 원만한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하학에서 가장 안정된 기본도형은 원이다. 그러나 원은 셋을 표현할 수 없다. 원에 가장 가까운 도형이 삼각형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 이상 더 완전한 방식이 없기 때문에 삼위 공동체를 존재 방식으로 택하셨을 것이리라. 우리는 그저 그렇게 짐작하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생명처럼 중요한 것은 관계성과 밀접성에 있다. 삼위 하나님은 가장 원만한 관계, 가장 밀접한 관계로 계셨다.
하나님은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으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왜 사람을 지으셨을까?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넘치시는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백성이 많은 것이 왕의 영광’이다(잠 14:28).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시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이 말씀의 전후 문맥으로 보아 하나님은 때때로 이 에덴동산을 그 사랑하시는 ‘사람’과 함께 산책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이 기록은 창 3장에 나온다. 이미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하나님의 앞에서 쫓겨난 후에의 사건 기록이다. 이 기록은 자연스럽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기 전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데이트를 즐기셨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셨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 6일은 사람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그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특별한 혼수를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거처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곳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심으셨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셨다. 인간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 정원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강이 이 에덴에서 흘러 동산을 적시고, 이 강이 다시 네 갈래로 갈라진다. 첫째 강은 비손이고, 둘째는 기혼이고, 셋째는 힛데겔이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 강이다. 첫째와 둘째 강은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셋째 강인 힛데겔은 티그리스라고도 하는데 넷째 강 유브라데와 함께 오늘날에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의 근원지 어디에 에덴동산이 있었다는 뜻이다. 첫째 강이 흐르는 하윌라 온 땅은 순금과 각종 보석이 나는 곳이다. 하나님이 혼수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거처이다.
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을까? 원래 사람은 본성적으로 벗고 있을 때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옷 역시 죄를 범한 후에 입기 시작했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 옷을 입은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것이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벌거벗은 상태로 아무 데나 앉거나 누워도 몸을 찔러 아프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것이 없었다. 잔디가 그냥 융단 같았을 것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맨몸으로 쉬고, 잠자기에 아주 적합한 그런 자연조건이었을 것이다. 창조 6일은 오직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사람을 위해 만드셨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엇을 위해 만드셨을까? 창조 6일은 오직 제7일을 위해 만드신 것이다. 제7일 안식일, 하나님의 안식이란 무엇일까? 아담과 하와는 그 안식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얼마 동안이나 참 안식을 누리며 살았을까? 아담과 하와의 에덴 생활은 얼마 정도 지속되었을까?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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