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이동
둘. 말씀운동의 역사와 악의 섭리,
짐승권세 중세 교황의 만행
4. 십자군과 면죄부 :
살상(殺傷)하라! 천국이 너희 것이라!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 21:24)
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중세의 부패한 교황권의 증거물로 아직도 스칸디나비아부터 스페인까지 분명히 남아있는 고딕 성당과 그 첨탑을 통해 살펴보았다. 신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교황과 주교들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역마다 어떤 건물도 성당보다 더 높이 짓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하늘을 향한 이러한 야욕을 불태우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마 제국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 나아가 아시아까지 고딕 성당 건립을 통해 교황 지배권을 확대하여 교황을 지상에 존재하는 ‘신’으로 우상화하려고 했다. 이 교활하고도 사악한 시도를 성취하기 위해 교황은 군대를 동원하여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국가 그리고 이슬람이 지배하는 예루살렘 회복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200여 년 동안 이어진 십자군 전쟁(1096~1291)이다.
앞에 인용한 누가복음 21장 24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70년)을 예언하신 내용이다. 장차 이루어질 내용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백성들은 칼에 죽고 모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방인의 시대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은 밟힌다는 내용이다. 이방인의 때란 이방인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섬기게 되는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기한을 말한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로마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래서 약속대로 이방인들이 지배하면서 밟히기 시작했으며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 실패 이후 135년부터는 강제 이주당해 유대인은 만방에 흩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또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성전을 비롯해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주후 618년부터는 이스마엘의 후예인 아랍 제국에 의해 400여 년 동안 밟힌다. 그 이후 십자군에 의해 11세기 말(1099년 십자군이 점령함)부터 13세기 말까지 밟히며, 14세기에는 몽골 제국에 의해, 그리고 16세기에는 다시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에 의해, 20세기 초에는 영국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1930~40년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겪고 1948년 귀환했지만 아직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방인이 밟고 있다. 2,000년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과 그 성취의 섭리가 이렇게 예루살렘 침략과 유린의 역사를 엄중하고 조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1517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예루살렘이 참극으로 유린당할 것을 언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과 그 성취를 기억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에 임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섭리는 한국 성도가 아직도 복음의 자유를 누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한 놀라운 은총(2014년 ‘성경신학총서’ 완간-박용기 저, 진리의말씀사-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혀 문서설의 허구를 폭로하고 개혁파 교회의 미완의 과제를 완수한 사건임)까지 받고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는 우리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무섭고도 참혹한 역사 속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로서 누리는 자유를 방종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오래전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유대인 학살로 시작한 십자군 출정식
십자군은 10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시작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뒤를 이은 우르바노스 2세는 그 기회를 보고 있었다. 때마침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가 이슬람의 위협을 받자 서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1095년 프랑스 클레몽에서 우르바노는 예루살렘에서 악행이 자행된다고 하며 원정군 동원을 위해 이야기를 꾸민다. 그 결과 귀족들은 소작인들을 모았고 우르바노는 그 명분으로 하나님께 바친다며 클뤼니 수도원의 확장 공사를 출정과 때를 맞추어 끝마친다. 클뤼니 수도원의 영광은 십자군 전쟁 시작의 분명한 증거로 아직도 남아있다. 십자군 전쟁은 구원의 길로 위장되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죽는 것이 천국 입성을 보장한다는 거짓말로 ‘면죄부’를 남발했다. 인간 구원은 오직 교황에게 달려있음을 확정하려는 속셈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면죄부’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십자군 원정대의 군인으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성결(聖潔)’의 보증이었다. 전쟁을 반대해야 할 기독교가 유럽인 전체를 전쟁의 소굴로 몰아넣은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다. 당시부터 유럽 가톨릭 성당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을 탄 전사’로 묘사한 그림이 등장한다. 요즘 이른바 유럽의 ‘순례길’로 유명한 스페인 콤포스텔라의 성당에는 사도 야고보를 전쟁 영웅인 ‘그리스도의 기사’로 받들었다. 이렇게 교황 우르바노스 2세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들은 1096년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며 원정을 시작한다. 바로 프랑스에서 이단자들을 처단한다는 이유로 유럽인들에 대한 최초 유대인 대량학살을 자행하여 예루살렘 원정의 출정식을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수천 명을 학살하고 참수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약탈물을 전리품인 양 분배했다. 이렇게 십자군은 잔혹한 만행을 시작하면서 살육전쟁을 시작했다.
2) 교황의 방조와 방관: 십자군의 만행
신의 이름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며 시작한 십자군 원정은 교황을 비롯해 모든 유럽인들 각자 자신의 목적이 있었다. 12세기 봉건제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서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유행이 생겼다.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곳, 그 예루살렘에 가 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르크 족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도 점령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청한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직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시작한 수도원 증축 등 가톨릭교회 개혁을 더욱 가속화하여 지배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배욕도 불태우고 있었다.
1095년에 시작하여 1291년 200여 년 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성지(聖地)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명분 속에 원정 참가자들도 교황처럼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은 서부 유럽 전체가 참여한 약탈극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십계명 중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말씀은 이슬람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적그리스도나 할 짓을 자행했다. 그래서 십자군들은 로마 기독교인 외에 모두 이단자로 간주했다. 동로마 황제는 처음 단지 기사 3백 명만 요청했으나 교황은 6만 대군을 보냈다. 서로마 교황의 속셈이 드러난 셈이다. 대군(大軍)을 보내면서 교황은 군권(軍權)을 강화하고 귀족들에게 넘어갔던 기사 지배권을 빼앗고자 했다. 그래서 만든 구실이 탐욕의 전쟁을 ‘속죄’의 기회라고 속이고 예루살렘 정복을 ‘성지(聖地) 회복의 성전(聖戰)’으로 구원에 목마른 유럽인들을 전쟁에 내몰았다. 전쟁을 통해 교황 지배권을 동로마까지 확대하고자 했던 이러한 조작극에 수많은 기사와 사람들은 십자군에 참전하여 속죄권을 얻고 천국행 ‘티켓’을 얻고자 앞다투어 참여했다.
그런데 참전했던 왕과 영주들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즉 동쪽 땅을 차지하여 더 넓은 땅을 지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소속한 전쟁 무사(武士) 혹은 용병들인 이른바 ‘기사단’은 전쟁을 통해 공을 세우고 구원도 보장받고 부와 명예도 얻으려고 가담했다. 그리고 장사치들은 원정 중에 군수품 매매로 이득을 챙길 계산을 했다. 또한, 농민들은 지긋지긋한 농노(農奴)에서 벗어나고자 참가했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을 ‘악마’로 규정하면서 서유럽 전체는 악마의 소굴이 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는 구실을 앞세워 200여 년이 넘게 전개되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점령 전에 위치한 성읍들 중에 투르크 족(이슬람인)이 지배하지 않는 성읍들인 같은 기독교도들도 죽이고 약탈했다. 당시 이슬람 지배하에서는 많은 성읍들이 다양한 종교 문화를 공유하면서 공존하기도 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성을 빼앗고 모든 사람들-유대인과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도들,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아이와 부녀자들을 사정없이 도륙했다. 시리아 북서쪽 마라트안누만에서는 천인공노할 살상과 참극이 일어난다. 보에몽이 이끈 십자군은 이교도의 시체를 파헤치고 단지에 넣어 끓이고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구웠다. 십자군은 인육(人肉)을 먹여 적에게 극도의 공포와 위협을 주고자 했다. 예루살렘 공격에서는 인간 시체를 절단해 ‘폭탄’으로 사용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행으로 시작해서 만행으로 마친 제1차 십자권 원정은 이후 200여 년의 전쟁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십자군 원정에 왜 참여했는지 그 만행의 결과가 증언해 주고 있다. 이슬람인들에 대한 살상은 다시 이슬람 군대에 의해 보복으로 되돌아왔으며 다시 수만 명의 유대인을 비롯한 기독교도들은 그 희생양이 된다.
서유럽을 출발한 지 4년 후 십자군은 1099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예상했던 대로 또다시 큰 살상과 약탈이 벌어졌으며 오랜 전쟁에 시달린 십자군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을 저질렀고 이슬람 사원도 불태우는가 하면 이슬람 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았다. 이슬람인, 유대인,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 3만 명을 죽였고 여자와 아이는 모두 태워 죽였다. 1204년에는 성지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동방 교회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를 약탈하고 그곳에 로마 가톨릭 제국 곧 라틴 제국을 세우는 일이 벌어진다. 아직도 동방 정교회인들은 서방인들에게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와 심판의 엄중한 역사는 성취되었다. 부패한 한국 교회가 아직 이렇게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증을 더해 온다. ‘풍성하다 못해 쌀독에 든 쥐처럼 이렇게 비대한데도 왜 망하지 않고 살려놓는 것일까?’ 이방인의 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뻔뻔하게 살고 있다.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사 42:24).
<142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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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원어 성경과 훈민정음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