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10
<한국크리스천신문>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미완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경 진리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완성으로 매듭이 지어져가는 제2의 종교개혁운동을 소원하며 특별대담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특별대담은 2017년 7월 19일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1. 개신교 내에 펴져 있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왜곡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성경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종교개혁 세대들은 교황 권위에 맞서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목숨을 다해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인간의 문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확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복음서를 임의로 편집하는 ‘공관복음 연구’라는 문서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성경 전체의 정확한 지식의 부재로 현실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성령의 사역이 누락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 500년 동안 온갖 유린을 당해 왔다는 것입니다. 교의신학에서 신론, 기독론, 교회론은 있어도 ‘성령론’은 없습니다. 교회론을 성령론이라고 바꾸어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신론, 기독론과 함께 성령론이 대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교회론보다 성령론이 앞서야 합니다. 성령과 교회는 대등한 개념이 아닙니다. 교회란 성령 사역의 열매이고 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논리적으로 통일된 ‘성령론’을 확증하지 못하자 이후 개신교라도 오순절 성령강림의 표적 사건을 모방하거나 그러한 종류의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라고 여기고 지금도 체험하려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은 당시 오순절에 임하신 보혜사 성령이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임을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표적을 사도들을 통해 일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신약성경 기록 완성의 놀라운 사역을 하심으로 교회 창립부터 교회의 최종 완성까지의 과정을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완결하여 정경(正經)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시대마다 택한 백성에게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복음 진리로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들이 성경 진리를 수호하도록 지금도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령론의 핵심입니다.
2. 저자는 평생의 성경 연구를 통해 사본 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논리 구조와 통일된 하나의 의미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정리해주셨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문서설로 인한 가장 큰 폐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서설의 가장 큰 폐단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서설이 대두되면 성경은 인간이 남긴 문서 수집물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 즉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존재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문서설이 대두되고,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단지 성경을 비판하는 주장들이 증가한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의 존폐와 직결되는 문제가 됩니다. 각자 자기 좋을 대로 아무렇게나 성경을 해석하면서 기독교의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한다면, 기독교인의 숫자만큼 신의 수도 그만큼 많다는 심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과학이나 세속 철학으로 결코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첨단 과학 기술이나 고도의 이상적 추론을 통해 증명하려는 신 존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념에 의해 조작되는 신입니다. 그래서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서는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신이 기자들을 감동하게 해서 기록한 것으로 현재 그 순서대로 공부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본주의적인 서양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이 조작해서 만든 우상을 타파하는 유일한 지름길로 봅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내용과 편집의 진정성을 문제 삼는 문서설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립한 서양 논리에 노예가 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조작된 인간 문서로 폄하하여 결국 영원히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적그리스도의 의도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제까지 개혁파 교회는 문서설자들의 강력한 비판 앞에 성경의 절대권위를 방어하지 못했습니다. 기자도 아시는 것처럼 우리의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현재 완전히 패배하고 있는 개혁파 교회의 미완의 과제인 성경 권위를 확증하고 있다고 봅니다.
3.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성경의 뜻을 밝히시는 성령께서 지금껏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작금에 와서 성경신학을 통하여 성경의 뜻이 드러났는데 어떤 이유로 밝히 드러내셨는지 저자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인 특별 계시 기록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진리 계시의 터 위에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셔서 정확무오한 진리로 양육하시고 무장시켜서 비진리와 투쟁하게 하시며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반드시 진리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 속에서 보혜사 성령께서는 모세부터 사도 요한까지 1600년 동안 점차적으로 성경계시 기록을 완결하셨으며,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점진적으로 그 시대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요한계시록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갔습니다. 저는 서구중심의 개혁파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칼빈도 요한계시록의 강해는 하지 못했습니다. 칼빈 이후 개혁파 교회 나아가 한국장로교 역사 속에서도 성경 권위는 구호로만 외치도록 하셨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확증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에 정확하게 전수하려는 ‘성경신학’은 성경계시 기록의 주체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경 권위 확증의 엄청난 사건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게 하시고 동역자들을 통해 성경권위 회복을 주도하고 계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무한 감사할 따름이며 남은 생명 이 귀한 사역에 온전히 몰두하게 하시길 다시 간구합니다.
4.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경을 들어서 알면 당연히 믿음이 견고하게 된 줄로 여겨 스스로 섰다고 착각을 합니다. 저자는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깨달아 믿도록 하시는 사역’과 믿도록 하신 성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구분을 하셨는데 어떻게 다른지 또 구분하신 성경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도의 믿음이 들음에서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백성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결코 인간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홍해 앞에 세워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간절히 애원하게 하시면서 불안과 염려 가운데서 홍해 바다를 가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신뢰를 확인한 다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아무 의심 없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워 확신 속에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믿음은 인간의 사색이나 경험으로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믿음의 주관자임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해 인간의 어떠한 능력도 허락하지 않는 과정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75세에 자손을 언약하셨는데 99세까지 이삭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위적 방법으로 약속의 자손이 아닌 이스마엘을 낳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이 실수 과정을 거쳐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나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에 복종하게 됩니다.
성경신학은 이러한 계시진리에 근거해서 기독교 인식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보혜사 성령께서 어떻게 성취해 가고 계신가를 지켜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성도에게라도 인간적 수단을 알려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주관하시는지에 전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신학으로 무장한 선배는 후배를 명령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경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 받았으니, 후배들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인위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말씀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에만 의존하도록 하길 간절히 애원해야 합니다.
5. 현재 개신교 성도들은 은사 실행보다 직분을 받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기존 개신교는 교회의 직분을 계급화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데 필요한 동일한 은사로 깨달아야 하는데 급기야 장로와 권사를 돈을 주고 사고파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성도 대부분은 교회의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서열을 따지는 계급과 벼슬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목사의 사업장처럼 교회를 외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복음의 귀한 직책을 매관매직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나 권사 혹은 집사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우선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직분이 벼슬이 아니라 은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사악한 지도자들이 장로나 권사를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목사의 말을 잘 듣는 것을 조건으로 직분을 매매합니다. 돈으로 산 장로나 권사는 교회 직분에 대해 배운 것이 목사에게 순종하면 받을 수 있는 것이 직분이라고 알고 있으니, 자신도 후배들에게 순종과 복종을 자연스럽게 강요하게 됩니다. 정말로 교회 직분은 현재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은혜의 선물로 받은 신령한 은사’입니다. 절대로 매관매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벼슬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적폐를 개혁하면서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의 동역자로서 장로나 권사를 건전한 지도자로 세워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6. 저자는 ‘은사를 실행하며 사는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선한 종의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종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면 됩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사명을 왜곡하게 되었는지 진단해 주시고 대안을 제시해 주십시오.
은사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해하는 것은 교회 직분을 이해하는 성경적 토대가 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직분은 직분자를 세우기도 하시고 넘어지게 하시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직분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면 교회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교회의 주인 노릇 하는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기 싫은 자로 하고 싶게 만들어서 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직분을 맡고 싶은 자는 오히려 욕심대로 내버려두어 직분을 받게 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대적이 되게도 하십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직분이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정하신 뜻에 따른 주권과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눈에 만족스럽다고 해서 ‘선한 직분자’라고 평가하거나 인간의 눈에 불만족스럽다고 ‘악한 직분자’라고 평가하는 것을 우선 삼가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쓰임을 받는가 보다 내 심령 속에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소망을 두고 ‘정말 이것이 내 삶의 이유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자 심령 속에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셔서 창세전에 정해 놓으신 대로 삶의 이유를 찾게 하십니다. 창세전 하나님의 정하신 선하신 뜻으로서 직분 이해는 어떤 직분이라도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신앙생활에서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 경외 중심의 직분을 강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받은바 직분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에 값지게 쓰시려고 성도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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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말씀운동의 역사와 미혹의 영: 중세를 세속 철학의 미혹에 버리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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