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다섯. 말씀의 운동력으로 성경권위 회복 운동 I - 영국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1. 잉글랜드의 민족주의:
성경 번역의 주요 배경
주후 9세기 중엽 영국은 웨섹스(Wessex) 왕가가 통일 왕국(앵글로색슨 왕국, ‘잉글랜드’라는 말도 ‘앵글 족의 땅’이란 뜻)으로 이끌었다. 알프레드(871~899 재위)와 에델스탄(?~939) 그리고 에드가(1075경~1107)로 이어지는 왕국이다. 이 웨섹스 왕국은 앵글로색슨 족의 7왕국 중 하나다. 이 왕국은 5세기 말경 영국의 남쪽 해안에 상륙한 체르디치가 펜랜드 지방에서 상(上)템스 강으로 남진하고 있던 색슨족을 제압하면서 건립된 왕국이다. 그리고 7세기 말에는 현재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데번(Devon) 주까지 영토를 넓혔다. 한때는 동서로 분열되기도 했지만 7세기말, 8세기 초에는 이네 왕(688~694)이 동쪽으로는 켄트 주를 서쪽으로는 웨일스 지방을 정복하면서 영웅 칭호를 얻는다. 그러면서 이네 왕은 법전(法典)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중세 로마 가톨릭제 중심의 봉건주의적 농업사회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이 왕국은 8세기 말 머시아 왕국이 한때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825년 에그버트 왕이 다시 독립 전쟁을 성공하면서 크게 번영하였고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전체 잉글랜드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9세기 중엽부터 데인 인의 침입은 웨섹스 왕인 알프레드 대왕 등을 중심으로 하는 웨섹스 왕가로 하여금 민족주의적 단합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 왕조는 더욱 성장하면서 7왕국 시대의 전란을 모두 제압하여 통일왕국을 이룩하면서 봉건제 중심의 영국 중세사회가 확립되도록 한다.
이러한 영국의 통일 과정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더욱 강화하도록 하였으며 후에는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만의 독특성을 확정하는 배경이 되었다.이렇게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이후 중세 기독교가 몰락하고 종교개혁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민족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예가 바로 잉글랜드의 자국어인 영어 교육을 확대하는 일로 구체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웨섹스의 왕 알프레드는 직접 라틴어를 배워 라틴 문서를 고대 영어로 번역하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국의 모든 젊은이들은 영어 읽기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중세 성인들의 교훈서를 자국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io』도 번역하도록 했으며,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은 직접 번역했다. 최초의 찬송가 50편을 번역하는가 하면 890년경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통해 향후 영국의 문예부흥의 속도를 더하도록 했다. 그리고 웨섹스의 다른 왕 에드가의 통치 시기에는 윈체스터의 주교 아텔올드가 베네딕트회 규칙을 라틴어에서 고대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자국 언어 중심의 학문과 문화를 뿌리내리고자 했던 시도는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의 거장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는 윌리엄 오캄과 나아가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위에 맞서며 성경권위를 주장하는 존 위클리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2. 유명론자의 외침,
인간 이성의 교만을 중단하라 !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했던 오캄 출신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0~1349)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함부로 이식한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기반을 두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 있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적 추론에 철저히 의존하는 이러한 보편적 개념이 ‘노멘(nomen, name의 어원)’이다. 이에 대해 윌리엄 오캄은 이의를 제기했다. 소박한 의미에서 ‘명칭’ 혹은 ‘이름’을 뜻하는 ‘노멘’은 수많은 개별적 사물을 대표하며 마치 항상 실재하는 진리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멋진 스마트폰의 참된 실재가 어디엔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존하는 아퀴나스의 ‘실재론’이다. 이에 대해 윌리엄 오캄은 참된 실재로 존재하는 스마트폰의 원형은 세상 어디에도 실재로서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붙인 명칭인 ‘이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윌리엄의 주장은 이성적 판단을 사용해서 궁극적이며 총체적 진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이성적 추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윌리엄은 “전체 우주의 관계에 대한 장엄한 체계를 포함한 아퀴나스의 학문적 가치를 부정”(339쪽)해 버린다. 아퀴나스가 수립한 중세 로마 가톨릭의 신학 체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근본 교리 자체를 통째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주요 교리들은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이해 방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 방식을 따르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가 담긴 신비한 영물(靈物)이 된다. 윌리엄 오캄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명제다.
윌리엄과 그를 옹호하는 유명론자들은 신의 존재와 관련된 ‘실체’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연한 대상’들 사이에는 질적 차이와 일치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본다. 로마 가톨릭에서 신성시하는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임재한다는 가설은 단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강요한 신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 사상의 근간을 붕괴시키는 이러한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들의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의 로마 가톨릭 사상 비판의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중세 신학이 철학의 시녀였다는 점을 근본 전제부터 폭로한 일을 유명론자들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명론은 종교개혁의 원리 중 하나인 ‘만인제사장’ 원리에 영향을 준 면도 있다. 유명론은 이성적 추론에 의해서 하나님 존재와 인식은 불가능하며, 이성적 추론에 의해 인간 구원도 확정할 수 없다고 본다. 즉 신의 존재와 구원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그 결과 유명론은 주관적 신비주의와 경건주의를 향한 길을 열어 놓는다. 이는 중세의 종교의식에서 벗어나도록 하면서 당시 발전하고 있던 출판업의 영향으로 스스로 읽고 생각하는 ‘명상’ 방식의 신앙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문화는 비교적 문화 수준이 발전한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문자해독 수준이 높았던 네덜란드에서 우세했다. 이러한 운동의 대표적 예가 네덜란드의 ‘공동생활형제단’이다. 이들은 공적 종교단체였지만 성직자 중심은 아니었으며 이들은 지방자치제를 추구했다. 이러한 운동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지배 전략인 종교적 지배와 종속 관계, 즉 사제와 ‘평신도’의 상하 계급을 일소했다. 만인제사장 교리가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준비되고 있었다. 평민과 종교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구나 최고 수준의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는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341쪽)
3. 위클리프의 성경권위 사수 운동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1384년)가 처음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제를 통해 다양한 개체들보다 더 위대한 보편적 실재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명론을 반대했다. 하지만 옥스퍼드 대학 철학자였던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시적 교회의 부패를 보면서 그 신학의 뿌리부터 비판하는 일에 나선다. 그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된 실재로서 참된 교회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면서 부정과 부패, 타락과 방종을 일삼는 교황과 주교들이 다스리는 로마 가톨릭의 조직교회를 실재하는 신령한 교회와 분명히 분리한다.
그러면서 실재하는 신령한 지혜에 속한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유일한 길은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경으로만 가능하고,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위클리프 사후 이러한 정신과 운동은 옥스퍼드대학의 위클리프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진다.
그들은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를 영어로 처음 번역하는 작업을 완수함으로써 교회의 절대유일의 표지인 성경의 권위를 주장했던 위클리프의 사상을 계승하게 된다.
위클리프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Mass)가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찬식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떡과 포도주 속에 하나님께서 물체로서 임재한다는 생각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임재설 교리를 위클리프는 “11세기에 교회가 세속 권력을 찬탈했던 동안 발전한 성직자적 기만”(344쪽)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윌리엄 오캄의 유명론도 반대하면서 동시에 아퀴나스의 실재론도 비판한다. 왜냐하면 위클리프의 기준은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밝히는 하나님의 존재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실재는 유명론이 비판하는 단순한 명칭이나 이름도 아니어야 하며 그렇다고 아퀴나스가 말하는 이성의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상에 속한 실재(reality)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서는 사형을 면했다. 하지만 죽음 후에 위클리프는 로마 가톨릭에 의해 정죄당하고 무덤이 열리고 그 뼈가 불타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가 전개했던 성경권위 회복 운동은 체코에서도 계속된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4~35).
<150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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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성경역본과 알파벳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