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2024년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2가지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매년 지속적으로 수십만 명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5년간 4천만 명이 교회를 떠났다. 이는 현재 미국 성인의 약 1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 사태의 심각성은 미국 교회의 모습이 미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직면한 소멸위기에 처한 교회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한국교회 명목상 교인 실태 조사’가 발표되었다. 이 설문이 시사하는 바는 심각한 교회의 위기 상황을 반영하는 결과치이다.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다니지만 신앙생활에 대한 진지하거나 절실한 의지는 거의 없는 이른바 ‘명목상 교인’은 전체 출석 교인의 39.5%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명 중 1명꼴(24.4%)로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인식이 불분명했으며, 구원의 확신 여부를 물었을 때 절반(51.0%)만 ‘예’라고 응답해 주목된다. 이는 기독교를 신앙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서 5명 중 1명만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함’(20.9%)이라고 응답하였고, 명목상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목적은 ‘마음의 평안’(47.8%)이었다. 명목상 교인이 아닌 경우와 비교해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현재 교회를 선택한 이유였다. 명목상 교인이 아닌 자들은 ‘목회자/설교 내용이 좋다’(29.9%)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으나, 명목상 교인은 ‘가족이 다닌다’(25.0%)가 가장 큰 이유였고, ‘목회자/설교 내용이 좋다’(14.2%)는 응답은 ‘거리가 가깝다’(20.6%)보다도 적었다. 이 설문 조사를 통해 코로나로 예배와 신앙생활에 위기를 경험한 최근 한국 교회는 작금의 실체적인 심각한 위기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분석하는 자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소 심한 비유일지 모르나 환자로 따지면 암 환자인데 증상에 별 의식 없이 그냥 가까운 보건소에 가거나, 동네 약국에서 편하게 필요한 처방을 받는 수준이면 이는 곤란하다.
나는 신년 크리스천신문 칼럼을 통해 2024년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2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명목상의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의 2024년 신년 예배에서 나는 존 웨슬리의 설교를 소개한 바 있다. 존 웨슬리는 사도행전 본문(“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8)으로 ‘명목상의 크리스천’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사제로 안수받은 웨슬리가 30대 중반에 선교지에서 돌아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에서 특별한 체험을 한 이후 1741년 6월 11일 옥스퍼드에서 행한 설교이다. 2024년 한국 교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 아닌 참신자(Altogether Christian)이다. 웨슬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형태 중에 ‘정직함’을 지적하면서, 정직을 신자가 스스로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착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교도들에게도 정직함이 있지 않은가. 우리 주변에도 보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정직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정직이 신자에게 필요한 인격이기도 하지만, 정직함이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두 번째 웨슬리가 지적하는 명목상의 신자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신자이다. 예를 들면 남을 대접 잘하거나, 성찬식에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신자로 보일 수 있지만 순수성 없이 모양만 고백하는 경우는 참신자로 보기가 어렵다(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웨슬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참신앙인’(Altogether Christian)의 요소로 ‘사랑’의 개념을 언급하였다. 참신자의 모습에서 가장 중요한 점검 리스트는 하나님 사랑이다(“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눅 10:27). 그리고 참신자인 우리는 하나님 사랑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랑에 자신의 생각과 가슴을 머물게 하여야 할 것이다. 참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두 번째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자식 사랑과 가족 사랑에 머물면 우리는 반쪽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명목상의 신자일 수 있다.
2024년 한국 교회와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다. 영적 분별력을 잘 이해하는 데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신앙감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철학자, 설교자이다. 1703년에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1716년 13세의 나이로 예일대에 입학하여 17세 때 졸업한 후 1722년 8월부터 뉴욕에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1724-1726년까지 예일대의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1726년 8월에 자신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토다드가 목회하고 있던 노스햄튼 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해 사역하다가 1729년 외조부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로 사역하게 된다. 이후 에드워즈는 두 차례에 걸친 영적 부흥과 대각성을 그의 목회지에서 경험하게 되고, 부흥과 1차 대각성운동의 변호자가 된다. 이후 그는 1758년에는 뉴저지 대학(프린스턴 대학 전신) 학장으로 청빙 받아 부임하다가 같은 해 3월 22일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는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신년이 되면 올해는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은혜를 사모하여 특별한 성령 체험을 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체험들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영적인 체험인지 그렇지 않은지 구별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불확실한 표지들을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확신한다면 이것은 문제라고 한다. 에드워즈는 신앙의 종교적 ‘감정’(affection), 이 ‘정서’를 우리에게 설명하면서 영적 분별력을 중요한 신앙의 요소로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정서’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위의 원천임을 역설하고 있으며, 분별의 대상으로서 정서의 중요성을 인지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그는 감정과 의지를 묶어서 정서라는 개념으로 체계화하였으며, 영적 경험의 중요성과 더불어 이를 잘 분별하여 기독교적 실천으로까지 확장 또는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2024년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위기 상황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신년의 신앙 필수는 2가지이다. 그중의 하나는 웨슬리가 말한 바대로 ‘명목상의 신자’(Almost Christian)가 아닌 ‘참신자’(Altogether Christian)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한국 교회가 복음의 본질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 복음의 본질이 강단에서 설교되지 않고 있는 작태는 아주 심각한 한국 교회의 위기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회심, 하나님 나라)이 강단에서 다시 설교되어야 한다. 마지막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영적 분별력’이다. 성도들이 자신의 종교적 열정에 도취하여 이것을 자신의 신앙의 척도로 여기는 잘못된 감정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에게 영적 경험과 더불어 의지 정서 실천이 동일하게 요구된다. ‘열매로 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입으로 무엇인가 거룩하게 고백하는 장식의 신앙에서 벗어나, 경험과 실천의 정서가 신앙의 순전한 모습으로 보여져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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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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