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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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4-10 14:3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전(聖殿)을 정화(淨化)하신 예수(Ⅲ)


<지난 호에 이어서>

V. 성전보다 큰 이, 인자 예수

마태는 예수와 바리새인 간의 안식일 논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율례를 어겼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는 이에 대해 구약 율법 정신의 관점에서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신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3-5).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와 의식 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쉴 수 없다. 직무상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수는 모세 율법이 제정한 성전법을 넘어서서 성전(聖殿)의 정신을 말씀하시고 자신에게 고유한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메시아 권위를 표명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예수 자신은 보이는 구약의 성전보다도 크신 자다. 성전의 제사에는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이라는 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불의한 제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예수의 말씀은 불의한 제물을 드리는 당시의 부패한 성전제사를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1-17).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시므로 정의로운 삶과 행실이 동반되지 않은 종교적인 제물 희생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선행을 행하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우며,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삶의 제사를 원하신다. 이러한 윤리적 제사는 구약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로부터 바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를 원하신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구약 이사야가 대언한 의로운 제사를 메시아적 권위로서 수행하신 행위이다.
구약의 다윗 회개의 시편도 이러한 예수가 가르치는 제사의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 51:16-19). 예수는 성전 제사의 정신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헌신과 회개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요, 각종 성전 제사란 이의 가시적 표현이어야 한다고 표명하신다. 그리고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메시아인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공으로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충족시키신다는 것이다.

VI. 신약의 성전: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公布)하신 것이다.
헤롯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46년간이나 걸렸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스스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과 함께 거하는 종말론적 사건을 증언한다.

VII. 성도(聖徒)의 몸인 성전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παρ&#940;κλητο&#962;, parakletos)’로서 “변호사/조력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comforter)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헤롯의 성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께서 성전 정화하신 사건 이후 40년 만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mosque)이다. 그리고 훼파된 성벽의 일부에서 유대인 방문객들이 종이쪽지에 기도문을 써서 성벽 틈에 밀어 넣은 장면이 보인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배꽃이 피는 이화학당 : 메리 스크랜턴(M. F. Scranton)
황순원 선생과 기독교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