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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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4-30 21: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배꽃이 피는 이화학당 : 메리 스크랜턴(M. F. Scran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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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랜턴(M. F. Scranton)은 이화학당(1886년)의 설립자로 잘 알려져 있다. 스크랜턴 부인은 여성 차별이 심한 조선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여성 교육을 시작하는데, 명성황후가 ‘이화학당(梨 배나무 이, 花 꽃 화, 學 배울 학, 堂 집 당)’이란 이름을 지어주며 이화학당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다. 고사성어 중에 ‘빈계지신(牝鷄之晨)’이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암탉이 울어 새벽을 알린다’는 뜻으로, 이는 성차별에 대하여 한국 문화에서 자주 인용하는 고사성어이다. 한국 교회에서도 여성안수와 관련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린도전서 14:34) 성경 해석을 두고도 여성 지위와 차별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38년 전의 여성의 지위와 차별을 위해 헌신한 스크랜턴의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주는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사에서 스크랜턴에 의하여 최초로 남녀가 함께 한 지붕 한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같이 예배드리게 되는데 이 예배당이 볼드윈(L. B. Baldwin) 예배당이다. 기부자의 이름이 붙여진 볼드윈 채플은 1892년 12월 25일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스크랜턴은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이로 만든 칸막이를 방 가운데 길게 세워놓고 한쪽에는 남자, 다른 한쪽에는 여자가 앉도록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기 다른 출입문을 사용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함께 볼 수 있지만 남녀가 서로를 쳐다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서양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는 놀라 달아나는 여성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이 방법은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스크랜턴은 한국 문화와 교회 내에 여성 천시와 차별을 불편하게 여겨 먼저 교회에서 이 문제를 없애려고 시도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스크랜턴은 의료선교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의료선교 사역은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과 함께 동역하였다. 메리 스크랜턴의 아들 윌리엄은 예일대학교와 뉴욕 의과대학을 마친 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 근대화 초기에 여성 전용 병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다. 스크랜턴에 의하여 1887년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이화 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이화 의료원의 전신)이 설립되어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진료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메리 스크랜턴은 남성 의사의 진료를 꺼렸던 조선 여성들을 위하여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여성 병원을 설립하였고, 고종은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을 뜻하는 “보구녀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스크랜턴 의료 선교 사역에서 주목하는 것은 아들 윌리엄이 시도한 시병원(施病院) 설립이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자신의 사택 옆에 한옥 4채를 구입하여 병원을 세웠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명칭을 하사받았다. 이는 윌리엄 스크랜턴의 조선 이름인 시란돈(施蘭敦)을 차용하고 ‘베풀다(施)’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스크랜턴은 복음전도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동에 ‘시병원’을 개설하여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벌이던 스크랜턴은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정동 밖으로 나가 애오개(아현교회), 동대문(오늘날 동대문교회) 그리고 남대문 시장(오늘날 상동교회) 등에 진료소를 분산하여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애오개에서 가정 먼저 의료활동을 개시하였다.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 애오개 언덕의 한옥에 ‘애오개 시약소’(오늘날 아현교회)를 열었는데, 서대문 밖 애오개는 어린아이들과 무연고자의 무덤이 많았고, 전염병 환자 진료소인 활인서가 있던 곳으로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위한 병원을 개설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애오개에서 부인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병원(施病院)이 시약소(施藥所)와 더불어 한국 근대 초기에 가난한 사람들(고아)을 치료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 아주 특이한 한국 초기 선교 사역의 현장이었다.

스크랜턴은 선교사로는 늦은 53세의 나이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그녀는 무엇보다 여성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배우겠다는 학생이 없었다. 학생 모집을 위해 길거리에 나선 메리 스크린턴 선교사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우여곡절 끝에 1886년 5월 31일 학교가 개교되었다. 최초의 학생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었던 조정 관리의 첩이었고 다른 3명의 학생은 이름도 여자라서 이름이 정확하지 않았는데 꽃님, 별단(서대문), 김점동이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외국 선교사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예를 들면 소문 중에, “선교사가 애들을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서 약으로 쓴다지 뭐요”, (선교사가 교육시켜 애들을) “미국에 보내서 노예로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크랜턴은 조선 사람을 사랑하는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갈 6:9).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아가 교육 선교사로서 스크랜턴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또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교훈을 통하여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한국을 만드는 데 희망을 두고 있다”라고 한국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스크랜턴은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창궐하여 버려진 환자와 걸인들 사이에서 아이들을 찾아 집으로 데려와 깨끗이 씻기고 입히고 먹이면서 교육을 시키기 시작한다. 초기 이화학당의 모습은 기숙사, 교실, 식당 모두가 학교에 있는 24시 공동체였다. 1908년에 이르러서 1회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이화는 여성 독립운동가 그리고 여성 리더자를 양성하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최고 산실이 되었다. 배꽃이 피는 이화는 이 시대에 기독교 교육 이념의 산실 이화였다. 이대 홈페이지를 보면 교육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 세기를 훨씬 넘어선 이화의 역사는 바로 기적과 창조의 역사였다. 여성의 인격화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구원하려 했던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이화를 통해 한국 여성사와 민족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겨 왔다. 이화가 이룬 교육적 성과는 창립 이래 이화가 견지해 온 남다른 교육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화 교육의 목적은 성숙한 기독교적 인격과 헌신적 봉사정신, 그리고 전문적 학술지식을 바탕으로 남녀 양성의 평등이 조화롭게 완성된 사회를 구현해 가는 개척자적인 여성 지도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 이화가 배출한 인재들은 종교계와 교육계는 물론이고 인문·사회·자연·예술계 등 각 방면에서 여성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이화 교육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화 역사의 페이지마다 무수히 붙어 있는 ‘최초’라는 접두사는 이화의 특별한 목표가 아니라 기독교 정신과 진선미의 이념을 실천하는 개척자적인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해 힘써온 이화의 고난에 찬 노력과 인고의 결과였다. …이화는 섬김과 나눔이라는 이화정신에 뿌리를 두고 21세기 우리 사회와 세계가 요구하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이화 교육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이화만의 발전을 넘어서 겨레와 조국을 섬기며 공동선을 향해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한 이화의 궁극적인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자 한다.” 스크랜턴 그녀의 가슴에 남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단어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조선 사람을 무척 사랑한 여성 교육의 개척자 그리고 한국 근대문화에서 여성 천시와 차별을 위해 노력한 선교사 스크랜턴에게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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