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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7-03 06: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과 기독교 (2)


몽양 여운형은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그가 특별히 금릉대학을 택했던 것은 신학을 공부할 뜻에서였다. 금릉대학은 기독교 대학이었기에 평양신학교에서 다하지 못한 신학 공부를 마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금릉대학 입학 추천서를 써준 언더우드가 “당신과 같은 사람이 끝까지 신학을 연구할 것 같지는 않소. 조선의 청년들은 모두 정치적 지향성이 강하오.”라고 하였다. 또한 여운형이 대학에 입학은 했으나 영어로 강의하는 수업을 듣기에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금릉대학 유학 생활을 중도에 하차한 그는 1916년 말 상해로 옮기고 직장을 찾았다. 상해에서의 첫 직장은 영국인 선교사 에드워드 에반스(Edward Evans)가 경영하는 종교도서관인 이문사서관(伊文思書館)의 영문 사무원이었으나 이듬해 정월부터 협화서국(協和書局)의 위탁 판매부 주임으로 옮기었다. 협화서국은 상해 미국연합회가 경영하였는데 운영책임을 미국인 선교사 조지 피치(George A. Fitch)가 맡고 있었다. 피치 선교사는 중국 강소성 소주 태생으로 아버지 때부터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대표적인 재중 미국인 선교사였다. 1909년부터 상해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당시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전도유망한 젊은 중국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중국 내에 기독교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어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선교사였다. 이 시기 중국 기독교청년회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전위로 공중보건계획, 아편 금지운동, 각종 스포츠·오락 활동, 교육·사회적인 쟁점에 대한 강연회 개최 등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유스호스텔 운영 등을 통해 많은 회원을 확보했다. 이상과 같은 당시 중국 내 기독교청년회를 관장하고 있던 조지 피치를 여운형이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조지 피치는 나라를 잃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여운형을 도와 상해에 있는 조선인을 위해서 내외서신 왕래를 비롯해 기타 연락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1919년 말 여운형의 도쿄행을 주선하는 막후활동을 한 인물도 피치였다. 여운형의 상해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활동 중 하나가 교회 활동이다. 그는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교민단 단장 그리고 상해 교민교회 일로도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다. 상해교민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시작한 것은 1913년 최재학이 상해에 오면서부터였다. 1914년 가을부터는 평양신학교 동기생인 김종상이 전도를 맡았고 이어 선우혁(鮮宇爀)이 맡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예배 인원도 많지 않았고 예배 장소도 정해지지 못했던 것 같다. 1917년에 와서 비로소 사천로(四川路)의 중국 기독교 청년 회관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예배 참석인원은 3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교회 임원을 선임했는데 전도인으로 여운형이 선임되고 서기에 임학준, 회계에 한진교가 뽑혔다.
여운형이 상해에서 한 또 하나의 사업으로 교민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세운 일이다. 여운형이 상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7년 봄 여운형은 교민 자녀들이 중국어를 몰라 중국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형편을 알고 교민학교 설립에 나섰다. 학생 5명으로 시작한 인성학교는 이후 점차 늘어나 1929년에는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여운형은 9년간 학교장을 맡아보았으며 이후 한글학자 김두봉과 선우혁 등이 교장직을 맡아 교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사업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인성학교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상해로 건너온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던 곳이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27일 설립된 상해 한인 기독교 소학교를 계승한 것이다. 1917년 2월 정식초등학교로 출범했다. 본교는 1917년 2월 조선 사람 간부 여운형(呂運亨)이 설립한 조선인 아동 초등학교 기관이었다. 인성학교는 임시 정부 시기에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상해로 건너온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던 곳이었다. 인성학교는 상하이 한인사회에 학교를 넘어선 ‘민족’ 그 자체였다. 민족 교육의 산실 인성학교는 1935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소학교 90여 명, 유치원 150여 명 등 2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민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차후 민족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임정 기간에 상해의 한인 단체들은 인성학교 설립을 통해 알 수 있었듯이, 학교설립, 의무교육 실시, 교과서 편찬 등을 교육의 기본 방침으로 정하고 민족 교육 운동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상해 인성학교는 상해 거주 한인 자녀 아동들에게 ‘조선혼’, ‘민족혼’을 키워주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하면서 민족 교육 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인성학교의 교장과 교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고, 민족 교육을 받은 인성학교 출신들이 이후 독립운동에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고, 상해 인성학교의 교육 방침과 이념이 이후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교육 정책을 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사실을 통해, 인성학교는 한국 근대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교육 기관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조선혼’을 강조한 민족 교육 운동의 산실임을 알게 된다.
여운형의 행적 중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하여 하라 다카시 수상 등 고위 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하고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일이 있다. 일본 정부는 3.1운동 발단의 중심이었던 여운형을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시켜 친일 자치주의자로 회유하고자 일본으로 초청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이를 역이용하여 도쿄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창하는 사자후 연설을 하였다. 여운형의 1919년 11월 27일 일본 도쿄제국호텔 연설은 34세의 식민지 청년 망명독립운동가가 적진의 심장부 도쿄에서 외친 독립의 함성이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설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번에 온 목적은 일본 당국자와 그 밖의 식자들을 만나 한국독립 운동의 진의를 말하고 일본 당국의 의견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 내각 각료들과 식자 제군들과 간격이 없이 의견을 교환하게 된 것은 유쾌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는 독립운동이 평생의 사업이다. 구주전란(1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나와 우리 한국이 독립국가로 대전에 참가치 못하고 동양의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우두커니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 심히 유감이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의 장래가 신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시기가 반드시 오리라고 자신한다....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 해방·부인 해방·노동자 해방 등 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서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이요,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평화와 행복을 우리 인생에 주려 한다. 과거의 약탈·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신의 뜻이다.”
1919년 11월 27일 제국호텔에서 연설을 마친 후 여러 질문을 받았을 때 아래와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한 점에서도 그의 기독교 신앙인의 단면이 짙게 풍긴다. (전략) ‘나는 열렬한 기독신자로 기독교는 세계에 담을 쌓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복지를 주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세계의 모든 것에 유쾌한 천지를 개척할 임무와 책임을 갖고 일체의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우리 선조는 살육과 검극(劍戟)으로 오늘을 만들었으나 이제 우리는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신이 창조한 자유와 평등이란 균등해야 하며 조선인임으로 행복하고 일본인이므로 불행하다는 논리는 없는 것이다. (중략) 현재 조선인은 한 민족으로서 자유를 요구하고 독립을 희망한다. 이는 조선국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이 일본제국으로서 엄연한 독립을 희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스스로 자신을 ‘열렬한 기독신자’라고 강조한 여운형은 하나님(神)이 인간을 창조하며 부여한 자유 평등은 균등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그렇듯 조선국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고백적’ 입장을 밝히었다.

여운형의 60여 년의 생애와 활동을 회고해 보면 그는 동학사상에서 인간 평등의식에 눈을 뜬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전도자로서 한동안 활동했으나 이에 머물지 않고 다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이념과 사상의 외연을 확대하였다. 여운형의 이념적 편련은 변화무상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신 저변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정신은 역시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이었다 할 것이다. 몽양 여운형의 전 생애를 보면서 이만큼 많은 격변의 시기를 경험한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로서 탁월한 업적이 있음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그에 대한 평가에 학자들 간의 논쟁점을 주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는가 유물론자였는가! 분명한 것은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조선의 독립과 민족 운동 그리고 그 시대의 탁월한 교육자와 정치가로서 필요한 활동을 한 시대의 그 시대의 크리스천 민족주의 애국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의 저격으로 6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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