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Ⅱ)
Ⅲ. 참된 기도의 전형(典型):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는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는 두 번째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드리신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예수는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기도 중의 모범적인 기도이며, 기독교 기도의 핵심이다. 독일 마르부르그의 신약학자요 실존주의 신학자 불트만은 피력한다: “예수는... 단순히 인간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그분 안에서 견본처럼 드러나는 전형일 뿐 아니라... 그분은 무엇보다도 계시자이다. 그분의 결단이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결단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트만은 예수의 기도를 전형으로서 인간의 실존적 결단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의하면 기도는 단지 인간의 결단에 끝나지 않는다. 기도란 인간의 정성(精誠)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예수는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십자가의 잔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가 반드시 마시고 받아야만 하는 세례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자기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도록 결단하였다. 이것이 기도 응답이다. 이것이 승리의 기도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하신 예수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전형(典型)을 보여주신다. 물론 예수는 주기도문도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이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 주셨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문은 기도의 정신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번영의 신학이나 무속종교의 기도와는 전혀 다르다.
번영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께 복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투자하고 정성을 들이라고 요구한다. 무속종교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무속신(巫俗神)들에게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제사물의 양과 질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무당굿은 하면 할수록 그 규모가 커지고 드리는 자들은 패가망신한다. 번영의 종교가 된 변질된 기독교의 부흥사들도 복을 받기 위하여 신에게 예물을 드려야 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치유 은사자들은 치유받기 위하여 엄청난 헌금을 요구한다. 이는 바른 기도가 아니다. 이는 상업화된 종교의 기도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사를 종교적 상품으로 바꾸는 가증한 일이다.
참 종교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져 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비우고 그분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야말로 참 종교의 기도인 것이다.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이러한 기도의 전형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친히 그 길을 가셨다.
Ⅳ. 예수의 인간성: 하나님의 인간 연대성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성, 즉 그의 역사적 사실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영지주의가 말하는 바 고난에 대하여 초연하고 무감각한 초연한 태도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예수는 다가오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특히 세 제자들을 향하여 요구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이들에게 격려하시기를 자기 곁에서 기도하면서 이 시련의 순간을 이겨내라고 하신다. 예수의 기도는 간절하여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 예수는 그의 모든 진액(津液)을 다 바쳐 기도했다. 이것은 인간 육신을 입으신 예수의 인간성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영지(gnosis)만 중요시하고, 육신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한다. 영(靈)인 그리스도는 저급한 육신의 고통을 맛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신과 영의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바로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의 육신으로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고뇌 속에서 성부에게 기도하는 예수의 인간성 속에서 그의 아들 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고난과 고통의 현장 가운데 함께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인간 연대성(Father God’s solidarity mit the humans)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되 도깨비의 마술 방망이처럼 일순간 “뚝딱”하여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죄지은 인간의 처지에 오셔서 머무시면서 인간의 연약성과 비참성을 경험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진액을 다 바쳐 기도하시는 아들 안에서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인간성이시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연대와 사랑으로 인해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자발적으로 그에 대한 사랑과 순교의 열정으로 몰아가게 하시는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성(the humanity of God, die Menschlichkeit Gottes)이다. 예수의 인간성 속에서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인간 연대성(human solidarity)이다.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사랑하시는 신성한 인간애(人間愛)를 말한다.
V. 육신이 연약한 제자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수의 이러한 태도는 제자들의 태도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예수는 첫째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願)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 제자들은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각(kairos)을 알지 못했다. 제자들은 단지 자기들의 선생에게 다가오는 위험성을 감지했으나 이러한 사건 계기들의 연속이 인류의 구속이라는 역사의 결정적 시각 속에서 진행된다는 각성을 하지는 못했다. 제자들은 마음으로는 기도하기를 원했으나 육신이 피곤함으로 잠들었던 것이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마 26:43).
제자들은 인류의 대속이 걸려 있는 이 밤이 중대한 시간, 구속사의 중대한 시간인 줄을 알지 못하고 육신이 약하여 잠들어 있었다. 이것이 제자들의 한계였고, 영적 어두움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제자들은 이 어두움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결정적인 시각에 처한 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어두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제자들은 빛이신 예수와 어두움인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제자들의 육신이 약한 것은 신체적인 피곤함을 넘어서 아직도 영적인 빛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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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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