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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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05 19:5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독립된 ‘의지의 자유’를 주었다?   

객원기자  지난 호(162호)에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언약’ 이해의 비성경적인 부분을 집중해서 논의해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또한 성취하시는 언약의 핵심을 모르면, 언약은 하나님이 하고 성취는 인간이 한다는 이원론과 공로주의로 흘러가서 급기야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과 구별이 없어집니다. 종교개혁 이후 130여년이 흘러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언약’을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매몰시켜버리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호는 개신교가 왜 알미니안 주의로 흘러가게 되었는지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9장 ‘자유의지’에 관해 집중해서 좌담회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우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하는 성경적 근거 구절부터 검토를 해야겠습니다. 제일 먼저 인용한 신명기 30장 19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결코 인간 의지에 자유를 부여했다는 근거로 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본문은 신명기 28장부터 30장까지 내용 전체를 봐야 합니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40년 전에 모세에게 약속했던 언약을 재확인해 주는 내용입니다.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언약과 함께, 동시에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복도 주지만 저주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뜻에서 ‘복과 저주’를 모두 이루신다는 언약 내용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언약 내용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도 함께 임할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언약대로 주시고 그곳에서 나라를 이루어 살도록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도 하도록 언약하시면서 불순종에 대해서는 진노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섭고 엄격한 진노를 하신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가나안 땅에서 성취하실 여호와의 삼대언약(三大言約, 자손·땅·통치)의 확정 내용이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근거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다른 구절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용한 요한복음 7장 17절은 그 앞의 7장 16절을 보면 이 구절이 ‘자유의지’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인용한 요한복음 5장 40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5장 38절을 보면 자유의지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한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은 명령이 아니라 언약이며, 인용한 야고보서 1장 14절은 자기 욕심은 사단의 정욕에 종이 된 것이므로 이 구절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됩니다. 이렇게 너무나 탈맥락적인 성경 인용에 근거를 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는 사실에 매우 놀라면서 실망하게 됩니다. 이것을 지금도 마치 성경적인 고백서의 고전과 유물처럼 다루고 있는 한국 개혁신학과 장로교 교단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함만 커집니다. 지난 호에서 밝힌 대로 한국 교회가 ‘여호와의 계시’의 관점에서 그리고 ‘언약성취섭리사’의 해석 원리에 따라 성경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P연구생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1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인간이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지난 호에서 다루었지만 창세기 1장 28절의 삼대언약(三大言約)을 이루는 과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미 정하신 뜻을 이루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간교하게 지어놓은(창 3:1) 사단이야말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욕심대로 마음대로 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단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하에 있으므로 그 어떤 의지나 행위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는 과정에 있으며 마지막 날 심판 받는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9장 자유의지 고백서를 보면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150여명의 개신교 신학자와 학자와 목회자들이 5년 6개월 간 일천 회 이상 모여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직 성경권위’로 시작한 개혁파 신학의 전통을 전수하고 보존하는 것보다 오히려 허물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네요. 오래 전이지만 모 신학대학원 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목사님 한 분이 찾아왔어요. 어항 속 붕어 비유를 들면서 어항 속에서 붕어는 자유로운 것처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어요. ‘어항 속 붕어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칩니까 미치지 않습니까?’ 바로 대답을 하지 않다가 결국 ‘미칩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고백서 제9장 1항에 보면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 필연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것을 보면 서양의 개혁파 신학은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인간의 독립된 의지를 주장하는 서양철학의 노예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자유를 말하려면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을 부정해야 합니다. 영원한 작정에 근거해서 언약과 성취의 섭리로 피조물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양립해서 병존할 수 없습니다. 절대자와 상대자 사이에서 상대자의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2000여 년 전 헬라철학의 본산인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에 던져진 바울 사도의 선언 하나를 소개하죠. 사도행전 17장 28~29절입니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수많은 잡신들을 만들어 숭배하던 헬라 사람들에게 세상을 만드시고 절대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개혁파 신학의 후예라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비성경적 ‘자유의지론’를 만들면서 다시 헬라철학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일찍이 개혁자 루터가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박홍기 연구원이 지적한 것처럼, 성경 인용마저도 자유의지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적잖은 실망감이 몰려옵니다. 진리 투쟁의 대상이 개혁파 신학의 신앙고백서가 된다는 이 사실 앞에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개혁파 선배들의 외침이, 아니,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S연구생  자유의지를 인정하려면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을 무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정을 무시하면 피조만물은 ‘우연히’ 생긴 것이 됩니다. 일종의 진화론적 발상이 됩니다. 지금 신앙고백서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정말로 신본주의가 인본주의로 추락하는 현장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비록 짧은 내용의 신앙고백서의 제9장이지만 개혁파 신학에는 너무도 치명적인 비성경적 내용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조금 전 원로께서 지적하신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 필연성’ 속에 인간의 모든 지·정·의가 종속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 세상은 인간 마음  먹은 대로 인간이 얼마큼 손대느냐에 따라 세상이 돌아간다는 말인데, 정말로 성경 진리를 왜곡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이네요. 피조 만물과 인간 역사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객원기자  인간은 죄를 자기 의지로 짓는다고 하는데 범죄도 로마서 7장 17절에 보면 원치않는 범죄를 하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죄의 권세는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 아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자유의지에 관한 신앙고백서 9장 2항에 보면 무죄(無罪) 상태 즉 타락 전에는 선악을 행할 ‘자유와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적인 고백문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의견들을 비판하고 나아가 대안도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제가 2016년에 쓴 『무엇인가 IV』에서 열 가지 성경적 핵심 개념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다루었습니다. 그 목적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본체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만 유일한 생명이심을 주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들 혹은 물고기가 움직이면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근본 한계이고 우둔함이지요. 피조물들의 그러한 움직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로 나타난 가시적 현상들입니다. 천사도 사단도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고백서에 ‘무죄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은 생명의 본체가 되시고 생명의 주인 나아가 생명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봅니다. 세상의 이른바 모든 생명 현상은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의 계시(啓示)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 운운은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 부정과 대적의 본능이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6~28절로 이어지는 말씀은 아담에게 준 통치권이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언약이 그 핵심이지, 인류 시조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아담에게 통치권을 아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도록 한 까닭이 나옵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선악과를 먹고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 어떤 다른 ‘핑계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담에게 독립된 의지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는 그 현상만 보고 ‘아담이 먹었다’고 하면서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피상적인 유치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유의지론’ 5항에서 부활한 영화(榮華)의 상태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봅시다. 타락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했다면, 부활의 영화로운 상태에서도 그 자유의지는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의지이므로 피조물이 선택하기에 따라서 영화의 상태를 누릴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자유의지 주장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한 작정 섭리에 대한 무지와 불신과 배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네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자유의지’ 주장은
헬라철학 이원론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절대주권성을 부정하는
비성경적 발상이다.


2. 중생인은 회복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P연구생  그렇다면 자유의지 관련 제 3항도 얼핏 보면 인간이 타락 상태에서는 선(善)을 행할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타락이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생긴 결과로 본다면, 심판 아래 있는 죄인 상태를 통해서도 결국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죄인이 되었다고 강조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욱 강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발상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한 작정 섭리는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중생한 자도 자신이 소원하는 바가 선인지 악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중생한 자의 특징은 의지 선택의 여지가 더더욱 없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느냐 육의 소욕을 따르느냐는 전혀 우리의 선택 사항일 수 없습니다.

박홍기 연구원  혹자들은 가령 예수님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2:42)는 말씀에서 예수님도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의지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자신의 의지는 모두 아버지의 주권하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말게 하시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도록 아버지께서 주관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소원마저도 독립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아래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육신의 소욕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속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주권성과 자비성을 의지하고 찬양하는 고백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이 구절을 인간 의지는 자유가 있다는 것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객원기자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나옵니다. 대다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두 가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중생한 인간은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의 권세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셨음을 확증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도들의 전 생애 어떤 한 순간도 독립된 의지가 없다는 것을 오늘 좌담회의 핵심으로 정리하면서, 성경 구절 하나 인용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피조물인 인간의 의지는 창조부터
심판 후까지 어떤 상태에서라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섭리하에 있으므로 독립적일 수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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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요더의 윤리학
칼 바르트의 인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