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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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18 21: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부활이란 무엇인가 (3)


5. 부활의 목적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가 육신으로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하시는 데는 그 목적이 있다. 첫 아담은 생령체로 지음을 받았다. 생명과만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과를 먹기 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었다. 그 결과 아담은 저주를 받아 육체가 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기 전에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저주받은 육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에서 살다가 육신의 죽음을 통해 저주받은 육체를 벗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간의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목적은 무엇일까.  1) 영원한 언약성취 인간의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언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벨 대신 셋의 출생을 통해 ‘부활’을 언약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의 ‘부활’을 예언하도록 섭리하셨다. 곧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을 뿐만 아니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깨어 영생을 얻거나 수욕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도록 섭리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부활’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해 주시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언 성취를 통해 인간들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고 경외하며 찬양케 하시려는 데 있다.  2) 인간창조의 완성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아담을 보시기에 심히 좋게 창조하셨으나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곧 생명과를 먹어야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로 완성되는 피조물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였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고 타락하여 죽은 영의 상태인 육체가 되었다. 그 결과 모든 인류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육체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인간창조가 완성되려면 반드시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부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창조의 완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성된 인간들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경외하며 찬양케 하시려는 데 있다.  6. 부활체의 특징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부활의 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특징을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가지로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활 전 몸의 실재적 상태와 대조되는 특징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부활 전에는 구체적인 육신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활한 후에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므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부활체의 특징은 형태를 비롯해 시간과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형태를 초월한 몸 신령한 ‘부활체’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는 데는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령한 ‘부활체’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문들이 닫혀 있는데도 그곳에 갑자기 형태를 갖추어 나타나 보이신 사실이 있다. 그리고 의심하는 두 사람에게 보이셨다가 형태를 초월해 갑자기 보이지 않기도 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있는 형태를 갖추어 만져보게도 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2) 시간을 초월한 몸 신령한 ‘부활체’는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활동에 따라 철저히 시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곧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는 반드시 시간의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이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만사에 활동하는 시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한 몸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 곁이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 또는 거리 등 여기저기 갑자기 나타나서 교훈하신 사실이 있다. 그리고 재림 때는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해서 어디서나 동시에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신 신령한 몸이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3) 공간을 초월한 몸 신령한 ‘부활체’는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자의 생활에 따라 필요한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곧 처지에 따라 생활하는 데 필요한 공간의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이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생활하는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한 후에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한 몸을 지니고 있으므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기저기 장소에 따라 환경을 가리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서 보이시며 교훈하신 사실이 있다. 그리고 재림 때는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해서 동시에 어디에나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7. 끝맺는 말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진리는 ‘심오한 과학적 진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직은 미숙한 현대과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도의 완숙된 학문이 기독교 과학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물리적인 전기의 힘으로도 죽어가는 많은 생명체에 대한 재생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하물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어 코에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생령으로 창조하셨다. 여기 흙이란 티끌이나 먼지라는 의미도 있어서 현대적 용어로 물질의 최소단위인 아원자를 연상하게 한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아원자들이 물리적인 기(氣)에 의해 결합된 것이 크고 작은 다양한 물질이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기(氣)의 원천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죽은 인간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설픈 과학적 상식으로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거나 조소하는 행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의 우매에 의한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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