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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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08 19:4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논평_성탄절,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종교


지난 12월 18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을 이끄는 사찰인 조계사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있었다. 서울 견지동에 위치한 조계사 일죽문 앞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에는 어린이 합창단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고 조계사 자승스님은 성탄 축하 메시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다양한 이웃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나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또 요사이 시쳇말로 가장 핫한 불교계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법륜스님은 지난 5월 한 공중파 방송의 예능프로그램이 출연해서 매년 성탄절에 교회나 성당에서 강론을 해왔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 성탄절에 법륜스님은 갈릴리 교회의 성탄 예배에 참석해 이 교회 인명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부른 뒤 강론 시간에는 갈등이 많은 우리 사회의 치유를 위해 함께 하자는 내용으로 설법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교회 인명진 목사에게 축하의 의미로 꽃다발을 전달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이제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게 되었다. 얼마 전 종교간 교류를 명목으로 국내 종교 지도자들이 주최한 ‘상대 종교 체험행사’도 있었고 석가탄신일에는 가톨릭 주교나 대형교회 목사가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종교간 교류를 주장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다원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다원주의는 어떠한 단일한 제도 또는 제도적 집합체도 지배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다원주의가 종교에 침투한 결과가 바로 종교다원주의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간 서로를 인정하고 교류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매우 그럴듯하다 더욱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다원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시대적인 합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화합하며 교류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보다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 다원주의의 배경은 이러하다. 절대진리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실패로 돌아가고 이상사회를 꿈꾸던 많은 철학자들과 정치가들의 꿈 또한 무산된 것이 작금의 현대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제 진리는 찾을 수 없으며 인류 역사의 법칙성과 방향성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 이른바 불가지론이다. 자연적으로 다양한 현상에 대한 절대적 판단기준은 상실되고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서로 인정하는 것 뿐이다. 대립을 하려면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누구도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이라는 확신이 없고, 현상에 대한 판단은 있으되 확신이 없기 때문에 다른 주장도 옳을 수 있다는 “차이의 인정”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원주의이며 이러한 다원주의의 종교적 양상이 종교다원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다원주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종교다원주의는 그 단어의 구성 자체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교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만사만물의 운행 원리는 무엇인가?”, “그 안에 사는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삶의 기준과 가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에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즉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성을 갖추지 않고 상대적이라면 그것은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그저 하나의 가설 또는 이론에 불과하다. 이러한 진리의 확고한 기초 아래 서야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괴변인 것처럼 보인다. 절대적이어야 하는 진리에 기초하는 종교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진리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결과로 해석되고, 절대성이 포기된 것은 진리가 아니며 그렇다면 자기 종교의 주장을 포기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종교는 절대적 진리의 기초 아래 서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가톨릭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기독교의 경우도 인간이 절대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지침서인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으며, 불교의 경우도 진리 체계를 말하기에는 이제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종교다원주의의 성립은 이처럼 각 종교들이 자기 종교의 절대진리를 포기(?)한 데서 기인 한 측면이 크다. 절대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상실한 종교는 자기 것만을 주장하기보다는 서로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중으로 부터 외면 당하지 않기 위해 종교다원주의라는 그럴듯한 주장을 내놓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종교는 진리를 강조하지 않으며, 진리를 가르치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은 종교로부터 진리를 원하는 대신 그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찾는 데 그친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는 그 자체의 속성상 한계에 부딪힐 것임이 자명하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신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바른 인식 아래 삶의 방향을 찾아 살아가게 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인 것이다. 진리에 기초하지 못한 종교가 주는 단순한 평화는 그리 오래갈 수 없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비유컨대 평화로운 음악 한 곡을 듣고 느끼는 마음의 안식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 평화는 지속될 수 없으며 거친 세상에 파묻히는 순간 바로 깨어질 평화요 안식인 것이다.
무릇 종교란 확고한 진리체계에 기초해서 그것을 가르치는 이른 바 “커다란 가르침(宗敎)”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때라야 그 진리를 깨달은 이들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게 되고, 그럴 때라야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있으며, 그럴 때라야 명확한 삶의 목표를 찾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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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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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인권, 인본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