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토론의 명수 칼빈_38
칼빈은 논쟁과 토론의 명수였다. 본래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무척 소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저술가로서 일생동안 자기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루터가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사나이다운 기질을 갖고 있다면 칼빈은 소극적이었고 내성적이었다. 특히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 로마 교회와 싸울 때 그에게는 유럽 각국의 개혁의 함성이 들리지 아니했다. 그는 오직 가톨릭교회에 머물면서 고전어와 교부 신학과 인문주의 학문과 법학을 공부함으로 여생을 굴곡 없이 편하게 살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지도자적인 리더쉽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칼빈에게는 큰 변화와 사건이 찾아왔다. 그 사건이 그를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도록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다. 친구인 콥(Cop)이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할 때 연설문을 써주었다는 이유로 당국의 체포령이 내려졌다. 당시 가톨릭의 법은 교회에 도전하는 것은 국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피할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보안법을 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칼빈은 콥 총장과 함께 연루되어 공모죄로 수배를 당하게 되니까 졸지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이 칼빈에게는 인생 일대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 회개를 체험하게 된다. 칼빈은 도피하는 중에 그의 친구인 류 틸레(Lons de Tillet)의 집에 숨어 살았다. 마침 류 틸레는 안굴헴 성당의 주임 신부로서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칼빈은 피난처를 삼고 수많은 교부들의 책과 자료들과 성경을 읽으면서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를 집필했다. 이때 칼빈의 생애는 전화위복이 되고 체험적인 신앙과 복음주의자로, 개혁주의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드디어 약관 27세의 나이로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었다.
칼빈은 철저한 성경 지식과 교부 신학으로 적을 물리쳤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의 목사가 되고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되고부터 칼빈은 안팎으로 끊임없는 도전과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때부터 칼빈의 생애는 곧 전투적인 삶으로 변했다. 물론 칼빈을 지지하고 따르는 친구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단과 자유주의자 그리고 철옹성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고통은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집단적인 것도 있었다. 칼빈은 여러번 죽을 고비도 넘기고 여러 번 재기 불능의 지경까지 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생해서 주의 일을 감당했다. 때로는 칼빈을 지지하고 따르던 동지들도 자기 자신의 이권 문제로 어느 날 갑자기 배신하고 돌아서서 칼빈에게 철천지원수가 된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실로 가슴을 찢고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가지고살았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환경에서도 때로는 편지로 혹은 논문으로 어떤 때는 직접 설교로 그리고 토론을 통해서 상대를 굴복시켰다. 칼빈은 토론의 명수였다. 그러면서 칼빈은 토론과 논쟁에서 패배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우선 확고한 성경지식과 교부신학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어학과 기억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나 이단들과 자문주의자들이 도저히 칼빈의 논리적인 변증을 대항할 수 없었다. 결국 칼빈은 잘 준비된 개혁자였던 셈이다. 거기다가 칼빈은 확신에 넘치는 신앙과 의지를 갖고 논적들을 하나둘씩 잠재웠다. 대표적인 예는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성경적이고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답신을 보냈지만 로마가톨릭에서 일언반구의 논박을 하지 못했다. 결국 칼빈이 이 논쟁에 승리함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다시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또 하나 재세례파들이 칼빈에게 공개 토론을 걸어왔을 때도 칼빈은 거뜬히 저들의 논지를 격파했다. 실은 칼빈의 전 생애는 토론과 논쟁 그 자체였다. 그 이유는 무지몽매했던 사람들에게 개혁 교리를 체계적으로 심어 주기 위해서 논리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논쟁이나 토론이던지 결국은 논리적 체계로 준비된 사람이 이기는 법인데 칼빈은 그 점에 있어서는 달인이었다. 칼빈은 복음의 변증을 위한 논쟁을 소명으로 이해했다.
진리가 침해되면 이리를 쫓는 고함이 필요하다
칼빈은 요나-나훔 주석에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모든 사람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충실히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모든 악한 자와 싸운다’(p.234-235)고 했다. 물론 칼빈은 가능하면 복잡한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진리가 침해를 당했을 때는 이리를 쫓는 고함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사도행전 주석에서 “평화란 이름은 그럴듯하고 달콤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이 사라지는 고통을 겪을 만큼 큰 손실을 치르고 얻은 평화는 저주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권 p.38). 특히 칼빈은 아리우스를 물리친 아다나시우스의 예를 들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논쟁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 세상을 살고 간 사람 가운데 칼빈만큼 적수가 많았던 사람도 드물고 칼빈만큼 비난과 욕을 많이 먹은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당하고 성경의 진리를 손상시키는 사람이나 학설이 있으면 생명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논쟁에서 항상 승리자가 되었다.
칼빈은 논쟁과 토론의 명수였다. 본래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무척 소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저술가로서 일생동안 자기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루터가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사나이다운 기질을 갖고 있다면 칼빈은 소극적이었고 내성적이었다. 특히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 로마 교회와 싸울 때 그에게는 유럽 각국의 개혁의 함성이 들리지 아니했다. 그는 오직 가톨릭교회에 머물면서 고전어와 교부 신학과 인문주의 학문과 법학을 공부함으로 여생을 굴곡 없이 편하게 살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지도자적인 리더쉽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칼빈에게는 큰 변화와 사건이 찾아왔다. 그 사건이 그를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도록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다. 친구인 콥(Cop)이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할 때 연설문을 써주었다는 이유로 당국의 체포령이 내려졌다. 당시 가톨릭의 법은 교회에 도전하는 것은 국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피할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보안법을 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칼빈은 콥 총장과 함께 연루되어 공모죄로 수배를 당하게 되니까 졸지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이 칼빈에게는 인생 일대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 회개를 체험하게 된다. 칼빈은 도피하는 중에 그의 친구인 류 틸레(Lons de Tillet)의 집에 숨어 살았다. 마침 류 틸레는 안굴헴 성당의 주임 신부로서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칼빈은 피난처를 삼고 수많은 교부들의 책과 자료들과 성경을 읽으면서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를 집필했다. 이때 칼빈의 생애는 전화위복이 되고 체험적인 신앙과 복음주의자로, 개혁주의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드디어 약관 27세의 나이로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었다.
칼빈은 철저한 성경 지식과 교부 신학으로 적을 물리쳤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의 목사가 되고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되고부터 칼빈은 안팎으로 끊임없는 도전과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때부터 칼빈의 생애는 곧 전투적인 삶으로 변했다. 물론 칼빈을 지지하고 따르는 친구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단과 자유주의자 그리고 철옹성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고통은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집단적인 것도 있었다. 칼빈은 여러번 죽을 고비도 넘기고 여러 번 재기 불능의 지경까지 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생해서 주의 일을 감당했다. 때로는 칼빈을 지지하고 따르던 동지들도 자기 자신의 이권 문제로 어느 날 갑자기 배신하고 돌아서서 칼빈에게 철천지원수가 된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실로 가슴을 찢고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가지고살았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환경에서도 때로는 편지로 혹은 논문으로 어떤 때는 직접 설교로 그리고 토론을 통해서 상대를 굴복시켰다. 칼빈은 토론의 명수였다. 그러면서 칼빈은 토론과 논쟁에서 패배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우선 확고한 성경지식과 교부신학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어학과 기억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나 이단들과 자문주의자들이 도저히 칼빈의 논리적인 변증을 대항할 수 없었다. 결국 칼빈은 잘 준비된 개혁자였던 셈이다. 거기다가 칼빈은 확신에 넘치는 신앙과 의지를 갖고 논적들을 하나둘씩 잠재웠다. 대표적인 예는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성경적이고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답신을 보냈지만 로마가톨릭에서 일언반구의 논박을 하지 못했다. 결국 칼빈이 이 논쟁에 승리함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다시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또 하나 재세례파들이 칼빈에게 공개 토론을 걸어왔을 때도 칼빈은 거뜬히 저들의 논지를 격파했다. 실은 칼빈의 전 생애는 토론과 논쟁 그 자체였다. 그 이유는 무지몽매했던 사람들에게 개혁 교리를 체계적으로 심어 주기 위해서 논리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논쟁이나 토론이던지 결국은 논리적 체계로 준비된 사람이 이기는 법인데 칼빈은 그 점에 있어서는 달인이었다. 칼빈은 복음의 변증을 위한 논쟁을 소명으로 이해했다.
진리가 침해되면 이리를 쫓는 고함이 필요하다
칼빈은 요나-나훔 주석에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모든 사람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충실히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모든 악한 자와 싸운다’(p.234-235)고 했다. 물론 칼빈은 가능하면 복잡한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진리가 침해를 당했을 때는 이리를 쫓는 고함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사도행전 주석에서 “평화란 이름은 그럴듯하고 달콤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이 사라지는 고통을 겪을 만큼 큰 손실을 치르고 얻은 평화는 저주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권 p.38). 특히 칼빈은 아리우스를 물리친 아다나시우스의 예를 들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논쟁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 세상을 살고 간 사람 가운데 칼빈만큼 적수가 많았던 사람도 드물고 칼빈만큼 비난과 욕을 많이 먹은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당하고 성경의 진리를 손상시키는 사람이나 학설이 있으면 생명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논쟁에서 항상 승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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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예배의 개혁자 칼빈_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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