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세상을 보는 눈을 연 칼빈_ 41
칼빈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했다. 대개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우리가 장차 누려야 할 천국은 아름답고 귀하지만, 현재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은 멸망의 앞잡이고 헛되고 헛되기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는다. 존 번연(John Bunyan)도 이 세상을 장망성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 대해서 무심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금욕적이고 수도원적 삶만이 참되고 이 세상은 우리를 속되게 하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우니 가능하면 멀리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중세에도 그러했지만 오늘날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칼빈은 창조, 타락, 구속의 시각으로 세상을 봤다
그런데 개혁자 요한 칼빈은 성도들의 세계관을 교정해서 성경적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즉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이란 큰 잣대로 세상을 보게 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신앙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세상도 성경에 계시된 진리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영광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이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하도록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칼빈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의 세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로 보았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볼 수 있는 눈을 부여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세상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로 지어졌다(히브리서 주석 p.266)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나서 우연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최고의 솜씨로 만든 걸작품인 것이다. 칼빈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이해하였다. 로마서 11장 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함과 같이 만유와 만사 온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서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빈은 창세기 주석을 쓰면서 “세상이 창조된 후 인간은 마치 무대 위에서 세워지듯 세상 안에 놓여졌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그들의 작가 되시는 하나님께 겸손히 경배한다.’’(1권 p.64)고 하였다. 그리고 “창조의 세계는 학습되어야 할 교과서이며, 정교하게 조화를 이룬 우주는 거울과 같아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다른 방법으로 묵상케 한다. 그리고 우주 가운데 편재하시는 성령님은 하늘과 땅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탱하시며 움직이신다”(기독교강요 I.13.14)고 했다. 칼빈은 성경의 눈을 통해서 세계와 우주와 만물을 보게 하고 역사의 배후에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세상은 타락했기에 중보자가 필요하다
성경은 이 세상이 인간의 허물과 죄로 죽었고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죄가 세상을 망치고 병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고 실제이며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부패와 타락은 바로 인간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발생했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 구원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는 세상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칼빈은 다니엘서 주석에서 ‘세상은 늘 타락함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썼다.(1권 p.164) 또 칼빈은 예레미야 주석에서 ‘세상이 더 악할수록 그리고 죄가 더욱 관영할수록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하나님께 더욱 더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2권 p.366). 그런 까닭에 세상 자체는 죄 덩어리요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도 예수도 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덤비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만용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는 구속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구주이시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으로 세상을 새롭게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을 기반으로 새롭게 변화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는 이 세상은 더 이상 장망성이 아니고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칼빈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롭게 된다는 소망을 심어 주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한 것처럼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칼빈이 세상을 보는 눈, 〈창조〉, 〈타락〉. 〈구속〉의 시각은 모든 사물과 인생을 보는 눈이기도 하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속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을 내다보았기에 이 세상은 썩어질 장망성이 아니라 소명(召命)을 갖고 일해야 할 땅임을 인식했다.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보증이 되시므로, 우리를 위협하는 불신자들을 따를 것이 아니라 담대히 우리의 발로 온 세상을 짓밟아야 한다.”(p.118)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심으로 세상에 질서를 회복시키셨기 때문이다.”(p.141)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온 세상은 시온산과 같은 곳이 되었다고 했다.
전술한 바대로 칼빈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낙관주의 세계관도 비관주의 세계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칼빈이 성경을 통해 이 세상을 〈창조〉, 〈타락〉, 〈구속〉의 3박자로 보았듯이 우리도 그와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어야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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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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