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교회 음악을 개혁한 칼빈_ 42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교회 음악 하면 우선 마틴 루터를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우람한 바리톤 음성에다 기타를 치며 노래할 줄 아는 음악가였다. 그런데 모든 소리가 노래가 될 수 없듯이 모든 음악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찬양이 될 수는 없다. 사실 교회 음악에서는 루터보다 칼빈이 더 분명한 교회 음악에 대한 신학을 가졌다. 시편 찬송을 만들도록 한 사람은 개혁자 칼빈이다. 칼빈은 신학자로서뿐 아니라 제네바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찬송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당시 의회에 보낸 요구서에 지적했다. 칼빈은 중세 음악과 대중문화에 뿌리를 둔 세속 음악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중세 예배 음악이라야 ‘‘교황 숭배’’를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시편을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은 곧 찬송의 개혁을 포함했다. 이것은 당시 매우 시급했다. 무엇보다 개혁 교회의 시편 찬송을 직접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루터가 아니었다. 찬송의 개혁 작업은 마틴 부처(Martin Butzer)와 스트라스부르크 개혁 교회에 위임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처의 시편 찬송은 독일어로 불려지게 됐다.
칼빈은 모국어로 시편 찬송을 만들었다
때마침 1538년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크로 피난 왔다. 그때 칼빈은 부처의 소개로 불란서 피난민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때 칼빈은 비로소 불어판 시편 찬송가를 갖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왜냐하면 불란서 피난민들은 독일 동료들이 부르는 시편 찬송을 늘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칼빈은 유명한 궁정 시인 클레망 마로(C.Marat)의 도움을 받아 시편 찬송을 만들도록 했다. 일부 곡은 칼빈의 귀에 매우 아름답게 들려 시편 25편과 46편을 채용하기로 했다. 특히 칼빈은 큐리에 엘레이 손-주여 긍휼히 여기소서-을 후렴으로 하여 십계명과 시몬의 찬송과 사도신경에 운을 붙였다. 칼빈의 작품은 시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의 본문은 1553년 스트라스부르크판에 나올 때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칼빈은 마틴 부처로부터 힌트를 얻어 모국어 불어로 시편 찬송가를 만들어 스위스 여러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교회 음악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칼빈은 교회 음악을 제한적으로 사용을 하도록 허락했다. 종교 개혁가들 중에 칼빈은 사람들에게 음악적 재질이 없다고 알려졌으나 아마도 그는 대학 시절에 일반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고전적 음악 사상과 인문주의적 음악 이론에 친숙했을 것이다. 음악에 대한 언급은 그의 성경 주석, 설교, 예배 형식에 잘 정리되어 있고, 제네바 시편 찬송서문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음악에 있어서도 성경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원리를 앞세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인간의 허영심과 육신의 욕심에 차 있는 인간의 음악적 오용의 위험성과 가능성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교회 음악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그의 정신적 멘토인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영향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본래 그의 학문은 미학(美學)으로 시작하여 점차 음악으로까지 이어졌다. 어거스틴의 음악관 이해의 중심이 되는 책은 그의 음악론(DeMusica)이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편 찬송가 서문을 쓰면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듯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받은 것 외에는 주님께 합당한 것으로 노래할 수 없다.’’고 했다. 시 가운데는 성령의 인도로 쓰여진 다윗의 시편이 가장 우수하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기독교강요」 3권 20장 32에서 음악을 말하면서 어거스틴을 인용했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칼빈은 가톨릭 예배의식의 개혁을 시도하면서 모국어로 시편가를 부르도록 했다. 그래서 가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을 할 때는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제네바 시편 찬송을 편집하면서 세운 기본 원칙이다.
칼빈의 음악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마틴 부처이다. 칼빈이 사용한 특이한 단어 중에 예정, 믿음, 구원의 단계, 성례 등에 관한 것들은 비록 칼빈 특유의 명확성과 종교적 깊이가 추가되었으나 마틴 부처의 가르침대로 반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부처의 의견대로 예배 시의 음악은 제한적으로서 시편을 부르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다. 칼빈은 찬양에 대한 부처의 입장을 수용하여 “성경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노래나 기도는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시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했으니 최고의 찬송이다
시편 찬송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공적 예배의 찬송으로 시편을 사용하는 것은, 첫째로 시편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며, 둘째로 보통 찬송가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적극 장려했다. 칼빈의 음악 세계를 잠시 살펴보면 이렇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칼빈의 음악 신학이라고 쓰는데 과연 음악에다 신학을 붙이는 것이 가한지는 모르겠고 생소한 말이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음악의 작용력에 주목하고 있다. 칼빈의 전집선(Opera Selecta 11:15)을 보면 “음악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타오르게 하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하도록 움직이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칼빈은 가사가 멜로디의 우위에 있으며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가사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악기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으나 교회에서 악기 연주는 반대했다. 당시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主)인 교회에서 말 없는 악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당시 올겐은 거의 우상처럼 여겼다. 그러나 칼빈은 교회 음악이 선교적 임무와 교육적 임무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했다. 요한 칼빈 그는 신학자요, 주석가요, 목사요, 설교가였지만 역시 개혁 교회에서 교회 음악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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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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