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개혁 정신의 반역 VI : 실종된 성경적 ‘연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이다. 그 분은 은혜의 주인이 되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창세전에 신령한 복(엡 1:3)을 받았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깨달아 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 여정이다. 성도로서 산다는 것은 오직 부요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가난하게 되신 그 의미를 평생 깨달아가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가 성도 생활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창세전 이미 받은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것처럼 다른 지체(肢體)들과 받은바 은혜를 나누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것을 잠시 포기하시고 그 부요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직접 오셔서 나누어주신 것은 성도들의 어떠한 행위도 그리스도의 부요를 대신할 수 없다는 엄격한 선언이기도 하다. 은혜는 그야말로 은혜이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다고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부요하심을 부정하는 범죄가 된다.
많은 거짓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요하게 해 주었으니 다시 갚아야 한다는 거짓을 유포시킨다. 이유는 명백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용해서 성도들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종으로 부리기 위해서다. 연보(捐補)의 원리는 한자어에서도 보듯이 자신의 부요함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심을 잠시 버리시고 언약 백성들에게 그 부요함을 나누어주셨다. 성도가 연보를 한다면 이유는 간단하고 명백하다.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격하면서 다른 이에게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연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헌금(獻金)’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연보의 뜻을 담기에는 부적절하다. 조상신에게 제사상을 차리고 음식을 올려놓고 조상신이 와서 마치 먹고 가기라도 하듯이 헌금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귀신숭배’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른 채 무당의 푸닥거리에 가족의 운명과 안위를 맡기면서 무당의 가슴과 허리춤에 꽂아 주었던 돈다발이 헌금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통탄스럽게도 한국 교회 곳곳에서 나약하고 어리석은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치는 제(재)물인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쁨으로 나누는 신앙적 연보인지 그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십일조 헌금’을 말할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 드린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마음으로 했다.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리품을 제물로 드린 것이 결코 아니다. 훗날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도 이삭을 기꺼이 드렸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향 땅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100세에 아들 이삭을 주셨다. 이 과정에서 연단 받은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 이삭을 바치라는 명을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려주실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무한 신뢰 속에서 이삭을 드렸다. 인간적으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지 몰라도 아브라함은 분명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처럼 자손언약을 성취해주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으로 기꺼이 이삭을 바쳤다. 이런 점에서 연보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의한 돌보심으로만 가능하다. 이는 다름 아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속 사역을 통해 직접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심으로 완성해 주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했던 여러 가지 방식의 십일조는 다름 아닌 부요하심을 잠시 뒤로하고 낮고 천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영혼의 절대자유를 성취해 주실 메시야 사역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께 드렸던 곡식과 열매와 과수의 십일조는 가나안 땅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를 초대하고 벌였던 즐거운 축제였다. 자신의 가족과 노비 그리고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함께 누렸던 잔치였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시면서 하나님 자녀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 예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나누는 자리는 레위 지파의 낙헌제이며 감사제를 동반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이 또한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성도들이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하실 예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유대와 예루살렘에 나타나셨을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었으며 성전 인두세를 받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거짓 선생이며 회칠한 시체의 무덤이라고 정죄하셨다. 산헤드린 공회의 탐욕적인 재물 갈취과정을 보면서 그들은 악한 목자라고 정죄했으며 그들의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무섭게 정죄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과 재물은 결코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이라고 속이면서 백성들에게 세금과 십일조를 강요하는 그들을 비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손에 죽으셨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이 누려야 할 진정한 영혼의 안식과 자유를 보장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도 완벽한 재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에서 억지가 개입하면 성경적 연보가 될 수 없다. 우상에게 바치는 재물일 뿐이다. 즐겁지 않은데 두려움을 조장하면서 혹은 매관매직으로 유혹하면서 헌금하라고 하면 그것도 우상제물일 뿐이다. 신약교회에서 연보는 누구한테 내는 것이 아니다. 성도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위해 연보를 스스로 사용하는 연보 사용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을 우선 고민하면서 찾고 그리고 그 목적과 뜻을 함께하는 성도들이 모아서 직접 그 연보를 사용해야 한다. 어떤 집단에게 무책임하게 재물을 맡겨 놓는 것은 성경적 연보가 아니며 교회 부패에 일조하거나 방조하는 행위가 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무엇보다 연보에 대해 더 신중해야 하며 성경적 연보의 원리에 우선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연보가 무엇인지 충분히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보는 우상 제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5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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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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