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개혁 정신의 반역 VII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간 한국 교회의 ‘예배’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0~23).
본문은 예수께서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서 그 마을 출신의 한 여인을 만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인은 그들의 예배 장소는 사마리아 곳곳에 세워진 산당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예배 장소라고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구약의 제사 행위를 말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과 북이스라엘의 후예인 사마리아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예배’는 제물과 제사장과 제단으로 구성된 제사 행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배 장소가 사마리아인지 예루살렘인지를 묻는 여인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도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답변이다. 사마리아야 그렇다 치더라도 예루살렘이 제사 행위로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말은 파격적인 답변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면서 제사한다고 판단하시고 예수님은 제사 곧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안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구원은 분명 유대인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주 곧 메시야는 유대인에게 나온다는 말씀이다. 바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특정한 공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truth)’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장차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거듭나고 중생한 자들은 누구라도 어느 곳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경외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 전체가 ‘참예배’ 혹은 ‘산제사’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물론 이 약속은 모두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보낼 성령을 약속하시고 그대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예루살렘부터 땅 끝까지 아버지를 경외하는 모든 자를 찾았고 또한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좀 길게 설명한 이유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타락하고 있는 ‘예배’에 대해 위의 말씀이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주일날을 ‘안식일’이라고 하지 않지만, 안식교인들처럼 구별해서 율법처럼 지킨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렇지도 않다. 필요한대로 자기 좋은 대로 ‘주일성수’를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으로 주일을 구별한다. 목사는 목사대로,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자기 좋을 대로 상황과 여건에 따라 그때마다 이용한다.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무지해 아직 어리고 순진한 성도들이 많아 악한 지도자들이 주일을 강조하는 이유와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많은 목사들은 주일이 율법적 안식일이 아닌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다급함과 절박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주일날 40여분 남짓한 두 번의 시간으로 공부시간을 편성하지는 않아야 한다. 수가의 여인이 하고 싶었던 대로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제사 행위를 하는 장소와 시간처럼 구별하여 ‘제사 행위’를 성도들에게 요구한다. 어리석은 성도는 그런 줄 안다. 삶이 지치고 불안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보다 그럴듯한 ‘제사의식’과 종교 행위가 심리적으로 더 위안이 된다는 것을 오히려 이용한다. 제사 행위를 위한 의식은 목사가 입은 가운에서 그리고 목사만 사용하는 교단(이른바 ‘제단’)에 서서 성도를 앉고 일어서게 하면서 진행된다. 음악은 성악(聖樂)이 되며 제사를 이끌어가는 제례(祭禮)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여기에 성도들의 현금은 ‘제물’이 된다. 봉투에 적힌 이름을 거명하며 봉투에 적어놓은 소원까지 읽어주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바친 제물에 축복을 해주는 특별한 의식도 행한다. 그렇게 하는 목사 자신들은 대부분 외식이며 종교의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사마리아 수가의 여인이 원했던 제사 행위의 반복이며 중세 천년 동안 교황제를 통해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들을 속였던 속임수의 재현이라는 것을 자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예배’라는 과장된 어법과 형식과 외식(外飾)으로 더 이상 성도들을 미혹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혜사 성령께서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영생의 가치를 간직한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다. 성도들도 성도로서 자신의 귀중한 가치를 오로지 성경을 통해 신중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말들이 과연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듣고 모르면 따져서 되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무책임하게 함부로 남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 자신에게 하나님께 서 맡겨주신 것이므로 선한 양심에 따라 자신이 책임 있게 써야 한다. 제물을 많이 드렸다고 만족하고 적게 드렸다고 진노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아직도 수백만 한국 교회 성도들이 주일이면 교회를 찾는다. 하지만 성경진리에 무지한 것을 그렇게 통탄하는 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동안 얼마나 세뇌를 하였는지 성경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성경을 알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오히려 성경을 너무 깊이 보려고 하면 이단이 된다는 말로 되받아치면서 되레 야단을 친다. 성도들이 성경진리를 점점 알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지도자들보다 성경을 점점 모르기를 바라는 거짓 지도자들이 더 많은 세상이 한국 교회가 아니길 바란다.
신령과 진성으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삶 전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의 죽으심으로 온전한 성전에서 완전한 예배를 드리셨다. 이 신묘막측한 진리의 비밀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더 확인해 갈 뿐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신령한 예배 혹은 산제사의 본질이다.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셨으며 보혜사가 되셔서 깨닫게도 하신다. 성경을 성경대로 공부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 열심과 환경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확증하도록 성경진리를 완성해 주셨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개혁의 핵심 슬로건이었던 ‘성경권위’ 회복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지금 여기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자 하는 지체들로부터 성경권위 회복운동은 시작할 것이다. 그 기회가 아직도 우리 한국 교회에 남아있길 애원하면서 진리의 말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5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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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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