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개혁 정신의 반역 X : 로마 가톨릭보다 더 미신적인 ‘예배’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앞의 본문은 모두 잘 아는 내용이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여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니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한다. 이에 예수님은 그 여자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고 지적하셨으며 지금 있는 자도 그의 남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남편이 없다는 여자의 말이 맞는다는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폭로시킨다. 이에 여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대답한 내용이 위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오며 참으로 예배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러한 사실로써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 약속한 메시야임을 증명해 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한다’는 약속의 말씀은 장차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실(요 15:26) ‘성령께서 가르치실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진정한 예배란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실 보혜사 성령(요 14:16,26;요 15:26)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예루살렘이든 사마리아이든 세상 어느 곳에서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섬기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예배하다(프로스퀴네오)’는 말은 ‘~에게 입 맞추다’는 뜻으로 신이나 최고 통치자에게 경외와 겸손의 표시로 경의를 표하거나 경배한다는 뜻이다. 물론 예배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다. 천사를 포함한 어떠한 피조물도 결코 경외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자신의 지상 사역을 시작하실 때 사단이 유혹한 세 번째 시험이 바로 사단을 경배하면 천하를 주겠다는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정죄해 버리셨다. 그리고 앞의 내용과 연관시켜보면, 성령께서 오셔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게 하시는 성도들의 삶 전체가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시간과 공간에 있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내어 살아가게 하는 모든 성도들은 우선 보혜사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신과 인정, 진리를 통한 성도 교제와 감사와 봉사의 삶 전체가 그야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살아가게 되는 예배’다. 비록 이 세상에서 일상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영혼은 질적으로 구별된 ‘영적 예배로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성경계시의 완결을 짓고 있는 요한계시록 특히 4장 이후 19장까지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예배와 찬양이 이어진다. 오직 예배는 영원하신 삼위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사역에 대해서만 일어나야 하는 것을 최종 확증하고 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계 7:12)”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외에 어떠한 것에도 경배와 경외를 드릴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우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며 대적이며 반역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성도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구교와 신교의 의식(儀式)으로 우상 숭배와 같은 ‘예배’는 그야말로 미신의 극치로 향하고 있다. 구교는 이른바 오직 사제(司祭)만 거행할 수 있는 칠성례(七聖禮: 성세,견진,성체,신품,혼인,고백,병자)로 교인들을 지배한다. 놀라운 사실은 구교 로마 가톨릭을 성경에서 빗나간 비진리라고 규정하면서 개혁을 한 신교 프로테스탄트가 ‘예배’를 더 미신적 의식으로 왜곡·변질시키고 있으며 이제는 악의적으로 사용하면서 ‘재물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팔아먹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이것이 일상화 보편화하고 있다. 즉 미신적 의식 예배에는 반드시 제사장(목사)이 있어야 한다고 속이고 또 제사가 제대로 드려지려면 반드시 제물(헌금)이 따라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부패한 기독교와 그 지도자들은 무지하고 나약한 성도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간 보면서’ 예배로 둔갑시킨 모든 의식은 결국 굿판 벌인 무당이 ‘잿밥’에 더 눈독 들이는 꼴과 방불하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잿밥 도둑’인 예배는 헤아리기조차 힘들 만큼 많다. 그것도 개혁파라는 장로교가 앞서서 이러한 미신적 의식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뼈아프다.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대예배, 공예배, 송구영신예배, 찬양예배, 저녁예배, 신년예배, 사순절예배, 부활절예배, 고난주간예배, 맥추절예배, 추수감사절예배, 수험생예배, 강림절예배, 성탄절예배, 3.1절예배, 6.25예배, 8.15예배, 조찬기도예배, 가정예배, 구역예배, 신방예배, (시찰,노회,총회)연합예배, 특별예배, 헌당예배, 입당예배, 봉헌예배, 목사안수예배, 목사위임예배, 목사은퇴예배, 장로안수예배, 집사취임예배, 권사취임예배, 약혼예배, 결혼예배, 장례예배, 개업예배, 졸업예배, 입학예배, 득남득녀예배, 돌예배, 수능예배, 파송예배, 감사예배, 부흥예배, 찬양공연예배, 기도예배, 서원예배, 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위로예배, 조문예배 등등. 이것 외에도 더 있으며 앞으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것이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영광의 고백과 찬양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사람의 명성을 높이고 이기적인 복을 빌고 세상의 성공과 물질의 축복을 탐욕스럽게 구걸하는 그야말로 무속적 기복 본능이 성경적 예배를 왜곡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의식적 예배에는 반드시 ‘제물’이 뒤따른다. 진리의 자유와 신앙의 성숙과 복음 수호와 전파의 사명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무속적이며 기복적인 의식으로서 미신적인 ‘예배’가 우리 교회와 성도를 돈과 재물과 욕망의 제물로 몰아가고 있다.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참예배 ‘거룩한 산 제사’는 시간과 공간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매사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주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는 삶 자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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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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