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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3 19:3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찾기 II : 성경의 통일성 확정 개념, ‘여호와’


16세기 종교개혁 정신의 총합,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500년이 지나는 동안 서구 신학 중심의 성경권위 주장은 구호만 난무할 뿐 확증은커녕 그 종말의 역사를 향하고 있다. 구속사의 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개혁파 신학의 성경신학(Biblcal Theology)은 권위회복 시도를 꾀하지만 오리무중이다. 문서설과 역사비평학에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성경신학자의 자리를 연연하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기만 하다. 수많은 성경신학자들이 성경의 절대권위를 확증하지 못하고  근거 없는 신학을 논하는 불쌍한 성경신학자로서 처지가 현대신학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성경의 통일성 확증’, 현대신학 아니 모든 신학에 던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던져진 물음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절대진리의 체계로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천 가지 모든 내용들이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일관된 완벽한 구조인 진리 체계, 이것이 우리 시대의 모든 시대마다 내려졌던 신학의 과제이며 신앙의 본질적 물음이었다. 그런데 이 과제를 해명하는 데 성경에 나타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전체 성경의 절반에만 나오는 결정적인 개념 하나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바로 이 개념에 모든 신학전개의 명운이 달려 있다.
서구신학은 여호와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리고 신학의 최고 개념이 이 중요한 개념 ‘여호와’ 대신 ‘Lord(주, 主)’를 선택했다. 이 순간 서구 신학은 이미 성경의 통일성 확보를 위한 시도에는 ‘종말’을 고한 셈이 되어 있었다. 권위 있는 옥스퍼드 영영사전은 ‘Lord’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in Britain) a man of high rank in the nobility(사회적 명성을 지닌 고위급 인간); 2. a powerful man in medieval Europe(중세 시대 땅과 재산을 많이 소유한 자); 3. God or Christ(하나님 혹은 그리스도); 4. Our Lord(그리스도 호칭); 5. the Lords(House of Lords, 상원)
이러한 정의가 ‘여호와’의 번역이라니, 성경 전체 주어인 ‘여호와’에 대한 가당하기나 한 번역인가? ‘Lord’라는 개념을 어떻게 ‘여호와’의 번역어로 쓸 생각을 했는지 이해를 하려고 해도 짜증밖에 나질 않는다. 차라리 헬라어 ‘퀴리오스’를 그냥 두는 편이 백 번 천 번 더 나았다.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쓴다고 하면서 사회적 맥락이나 정치적 고위급 인물 정도에나 해당하는 언어로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번역하는 용어로 쓰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떤 근거를 갖는지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서구 지성사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 ‘야벳족(Yafete)’의 근본한계에 대한 노출이다. 서구인들 중심의 여호와 이해의 한계였다.
구약성경의 수신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진 신의 이름은 ‘여호와’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 이르는 조상들에게는 하나님이 전능자이심을 알려주셨지 여호와를 알려주시지 않았다. 다시 말해 조상들에게는 자손과 땅과 통치 언약을 이루어주시지 않았는데, 모세를 통해서 자손과 땅 나아가 통치 언약을 이루어주셔서 세상의 모든 사건은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것으로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임을 알려주시겠다는 것이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다. 바로 전능자 ‘여호와’에 대한 확증을 해주시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특별계시 기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기록 목적이기도 하다.
‘여호와’는 창세기 2장 4절을 처음에 등장하여 구약성경에서 6천여 회가 나온다. 그야말로 구약성경 기록 목적이 ‘여호와 계시’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글 신약성경을 포함해  모든 신약성경에서 ‘여호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예외가 있긴 하다. 유대인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신약성경을 번역할 때 ‘퀴리오스’를 상당수 ‘여호와’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신약에서 ‘여호와’ 혹은 ‘야웨’를 살리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 천 년 로마 가톨릭의 라틴어 번역 그리고 종교개혁으로 시작한 유럽 개혁파 교회들의 성경 번역의 역사 그리고 그 이후 500년의 개혁파 신학의 역사, 이러한 역사 속에서 서구의 성경신학은 ‘여호와’를 신약 번역에서 결코 넣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성경의 통일성을 확보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130여 년 전 그 서구신학을 받아들인 우리로서도 신약에서 ‘여호와’를 만날 수 없다. 교황의 거짓 권위에 맞서서 ‘오직 성경만으로’를 지키고자 온몸으로 성경의 절대권위를 사수하고자 시작한 서구의 개혁파 교회,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통일성 있는 완벽한 진리체계’를 확보하지 못해 역사비평학과 문서설의 공격에 진리의 좌표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 시점에서 성경의 통일성 확보를 위한 지난 40년 연구 성과로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은 신약에도 분명히 ‘여호와’ 개념이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성경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진리체계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서구의 종교개혁과 그 이후 근현대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연구 과정의 한계가 무엇이고 신약성경에서 ‘여호와’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을 전개했다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것이 신학의 본질적 문제라고 한다면 앞서 말한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이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마친다. 계시의 저자는 인간이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 사역과 계시 섭리의 주체이시며 주관자이시다.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적 단서를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괄호 안의 구절(계 1:8;4:9,11;11:17;15:3;16:7;18:8;21:22;22:5)에는 ‘주 하나님’이 나온다. ‘주’는 헬라어 본문 ‘퀴리오스’의 번역이며, 하나님은 ‘데오스’의 번역이다. 그런데 신약에 나타난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와 ‘여호와’의 번역이다. 앞의 구절에는 ‘주’를 ‘여호와’로 번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신학의 결정적 난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실마리가 된다. 앞의 본문을 물론 신약에 등장하는 ‘주 하나님’은 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성경의 통일성 이해는 그만큼 선명하게 된다. 그런데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서양 신학은 ‘여호와’를 신약성경에 넣을 수 없었다. 이제 이 못다 한 성경권위 회복의 역사상 중요한 일이 완결되고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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