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믿음의 신적 절대성 확립하기
1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1-8)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믿음(faith, pistis)’이다. 이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면 기독교 정체성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기독교 진리 이해와 관련해 가장 많은 오해와 오류를 야기하는 개념이 또한 ‘믿음’이다. 문제의 핵심은 간단하다. ‘믿음’의 주관자와 주어를 시작·과정·결과에서 ‘하나님’으로 보느냐 아니면 인간에게 그 능력과 여지를 남겨두느냐에 달려 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 사건에서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가장 큰 변화를 이끈 문제가 바로 ‘믿음’에 관한 문제였음은 익히 잘 알고 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본질적 차이, 개신교 내 다양한 종파의 분열 원인 그리고 적그리스도 이단들의 출몰과 침투도 바로 ‘믿음’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점과 연관된다.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받은 믿음은 시종 전적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신적 절대성의 계시 사건’임을 성경 본문의 논리적 이해를 통해 알아보려고 한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에서 강조한 부분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면서 ‘신적 절대성 계시로서 믿음’을 정리해 본다. 이스라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얻은 것(1절)은 아브라함의 행위의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관한 한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은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다.(2절)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4장 1~2절에 근거를 두고 구약 본문 창세기 12~20장까지 나타난 사건에서 문법적 주어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사건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주어로 등장하는 문장을 아브라함이 믿음의 관리자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창 12:4)는 문장에서 여호와는 명령자이고 아브람이 믿음 관리의 주체가 된다고 판단하면 오류다. 그렇다면 로마서 4장 2절과 모순된다. 앞의 창세기 본문은 그 사건 상황에 대한 문법적 주어로서 아브라함이 등장할 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3절)고 하는 본문 말씀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의 신적 능력이 근본 주관자가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로마서 4장은 강력한 근거를 제시한다. 다음 말씀은 창세기 12~20장을 바르게 주석할 수 있는 해석의 대전제가 된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5절)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자를 하나님이 은혜로 의롭다고 하시며 이러한 사실을 믿어지게 하신다. 그래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6절)이 전적으로 신적 믿음의 절대성의 계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과 관련된 복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피조물이 의(義)를 위해 ‘일한 것이 전혀 없도록 하신다.’ 그래서 창세기 12~20장을 보면 아브라함 생애동안 그의 허물과 실수와 불신이 끊임없이 폭로된다. (그 이후 이삭과 야곱 관련 사건이 이어지는 창세기 36장까지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개칭(改稱)한 이후에도 그의 실수와 허물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로마서 4장에는 그 사건을 ‘믿음에 나타난 신적 절대성 계시’로 이렇게 정의한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7절)다고 확정한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허물과 실수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불법’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하신 자손, 땅, 통치 언약을 조건 없이 보호하고 성취하신다. 그래서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언약자손의 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정한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8)는 말씀이 믿음의 신적 권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아래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주어로 놓을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1-13)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의인 되었다면 어떤 인간적 조건이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 아브라함의 의를 주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자의 조상이 된 것은 할례받은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그들이 어떤 인간적 조건이나 행위 때문에 택함받은 백성이 된 것이 아님을 확정짓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통치 국가를 유산 받는 것은 어떤 인간 공로의 율법 곧 행위가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 주관하는 의’(13절)의 결과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아브라함‘의’ 믿음 혹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란 말은 비성경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우선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로마서 4장에 나타난 믿음에 관한 진리는 ‘믿음을 은혜로 받은 아브라함’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피조물의 어떤 의지와도 무관한 ‘믿음의 절대성’을 대전제로 삼아야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바탕에 놓인다. 은혜로 주신 믿음에 관한 한 어떤 경우에도 아브라함을 주어로 사용하거나 강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믿음’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더라도 살리실 것을 믿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의지와 행위가 개입할 곳은 전혀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롬 4:16)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조건적 은혜로 주신 절대적 믿음에 속한 자’라는 뜻이지, 아브라함이 자기 의지로 믿음을 잘 유지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반드시 주어로 삼아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절대성에 나타난 여호와의 계시’가 바르게 이해된다.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만이 살리라’(원문 번역)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며 아래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16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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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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