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 ‘문자론’의 종말과 성경의 신적 권위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요 7:14-18)
인용한 말씀에 보면 ‘글을 배우지 않아도 가능한 진리’가 존재한다. 즉 문자를 초월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문자를 초월한다는 말을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문자를 통해서도 전달되지만 문자 없이도 전달되는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문자에 대한 정통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본래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문자 기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이해에는 반드시 기록한 원저자의 관리·감독이 필수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록한 말씀을 택한 백성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분은 문자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을 실제로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기록된 말씀을 주셨는지, 어떤 신적 의도가 그곳에 담겨 있으며,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바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확증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요 1:1)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하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자 기록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를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깨닫게 하실 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숙고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성경관이 정립되어 절대진리 성경의 신적 권위가 회복되길 간구하면서 말이다.
본문 내용을 좀 더 따라가 보자.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에게 배운 바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율법을 강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교훈의 출처 혹은 근원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글자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바른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어디에 속한 것이며 누구로부터 받았느냐가 결정적임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하시는 말씀에 보면 글자를 보고 실천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경 진리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지 인간의 자기 욕구를 행하는지 구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 성취인지 인간의 욕망 충족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피조물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자신이 하늘에 속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진리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진리 인식의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에 (18절에서)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도 바리새인들처럼 구약의 많은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신다. 하지만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출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도를 완성하시는 사역이 된다. 반면에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은 단지 ‘글자’로 보이는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기록 의도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악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의 원저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성경을 보더라도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성경의 문자를 인간들에게 이해하라고 하면 반드시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지적 욕망의 도구로 만들며 그래서 자기 영광만 추구할 수밖에 없다. 어떤 명강의 명설교라고 하더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가 될 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구약을 신적 권위가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배웠던 유대인들이 그 기록의 실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이라는 문자를 사용해 죽인 사건이다. 참으로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이용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그러한 살인 행각을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로 여긴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 자체를 보거나 들을 때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돌보심이 없다면, 자기중심적으로 말씀을 오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의 범죄에 우리도 동참하는 꼴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경에서 보이는 문자의 관리자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영 곧 성령 하나님이어야 함을 다시 확정할 수 있다. 문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율법을 손에 들고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범죄가 발생한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리치면서 그 말씀으로 지체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영적 살인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문자로서 성경 해석은 정말로 종말을 고해야 한다. 하지만 글자로서 성경의 종말도 역시 성경의 원저자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통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를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부분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거나 실천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하나님이 깨닫도록 해 줘야 알 수 있는 그런 문자의 조합이 아니다. 일점일획이라도 인간의 판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그런 문자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 기록이라고 할 때, 이 말에는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자기 백성에게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깨닫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지 인간의 이해와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인간이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지성은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으며 일상생활 중에서 성경 없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발상은 연쇄적으로 기독교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다면, ‘성경은 절대진리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도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글자의 표면을 보는 것과 글자의 이면을 깨닫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말씀을 보고 들어 깨닫게 할 자에게는 마음에 할례를 하신다. 반면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성경 기록을 의문(儀文) 곧 자신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글자로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대로 죽인 유대인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오직 성령의 주권과 은혜가 우리를 통치해 주시길 기도한다.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유대인 희생 역사의 신학적 의미 찾기 |
영적 사망, ‘철학적 사유’ 바탕 알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