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예배 회복의 토대, 가정교회의 성경강론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 28:23, 30-3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사도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구약) 성경을 2년 동안 강론한다. 창세기부터 말라기를 풀어서 구약 모든 기록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설명했다. 이러한 성경강론은 로마 도착 이전 예루살렘과 아시아에서, 동유럽과 헬라반도에서 이미 했던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강론하는 것이 교회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성령의 사역은 바로 이 성경강론과 함께 시작하며 그로써 교회를 설립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다시 그 성경강론으로 양육한다. 그렇게 가르쳤던 말씀이 95년경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 성경강론이 진행되는 집(오이코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집’이 되며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하나님 나라가 된다. 여기에 어떤 다른 추측과 상상을 더할 것은 없다. 교회의 유일한 지표는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신적 케리그마의 선언 곧 성경강론밖에 없다. 이것으로부터 모든 신약시대의 예배 생활이 가능하다.
엔데믹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한국 교회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부분이 예배 회복이다. 2023년 한국개혁신학회 정기학술대회 제목이 ‘개혁교회와 예배 회복’이 될 만큼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바로 예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떠오르는 ‘예배’는 이미 내가 제도적으로 소속한 교회를 먼저 떠올리고 그곳에서 의식(儀式)의 절차를 따르는 그 행위가 먼저 떠오른다. 아니다. 그게 먼저가 아니다. 가정을 교회로 먼저 생각해야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가정교회라면 무엇보다 성경강론이 정상화하고 있는지를 떠올려야 한다. 이러한 생각의 내용이 없다면 교회의 예배회복은 공허하거나 맹목적이 된다.
하지만 수많은 성도들이 신약교회 예배 생활의 토대가 가정교회와 그곳에서 시작하는 성경강론임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두세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분도 함께하신다(마 18:20). 이 약속이 바로 가정을 교회로 약속하셨다는 것이 아니면 어떤 약속이겠는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정은 혈육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혈육에 결코 얽매이지 않는 신령한 연합체를 말한다. 예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 12:48-49)”고 하신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은 혈육 그 이상이다. 혈육 그 이상이므로 혈육으로 함께 하면서 성경강론으로 양육 받고 다른 지체를 혈육처럼 사랑하게 된다. 후에 예수님의 혈육이었던 야고보 사도가 예루살렘 감독이 된 사례는 혈육으로 함께 했지만 혈육을 초월하는 신령한 연합체로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예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가정교회의 너무도 분명한 예가 나온다. 바울 사도는 마치 가족을 소개하듯이 가정을 중심으로 성경강론 곧 말씀사경회가 진행되고 진리의 말씀으로 교제하는 30여 군데의 가정교회를 소개한다.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바울의 서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성경을 공부하는 교회들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며 종과 주인이 함께 한다. 바울의 혈육도 있지만(롬 16:7) 그 혈육은 신령한 연합으로 초월해 버린다. 루포의 어머니를 신앙 안에서 바울 자신의 어머니로 소개한다.(롬 16:13) 모든 가정교회 성도들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안내자에 의해 성경강론을 하게 하시고 그 가정교회에 양육받은 각각의 은사가 있다는 것이다. 귀한 제자이며 형제이며 또한 동역자들이다. 이 모든 30여 곳 문안의 대상이 다름 아닌 가정교회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만약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내 교회’ 혹은 ‘우리 교회’라는 용어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로마서 16장에 나타난 대로 가정교회 성도들의 안부를 묻고 그리워하고 성경강론 중심의 교회로 잘 자라기를 바라는 교회 문화와는 너무 동떨어진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강론으로 양육 받은 가정교회의 성도들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주일 모임(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각종 경건회나 교제를 통해 아름답게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시공을 초월해 찬양하게 된다. 이것이 온몸으로 드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롬 12:1; 요 4:23)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성경강론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현실적 안타까움(부끄러움)은 부모 세대들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강론하거나 말씀을 안내할 수 있는 능력이 대개 없다는 것이다. 성경강론 중심의 예배 생활을 할 수 있는 교회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급하고 다급하다. 예배 회복은 가정교회가 성경강론을 시작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태도와 발상의 대전환 곧 성경강론 중심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목회자도 목회의 출발과 중심이 가정교회를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이 목회의 최후의 결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른바 목회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가정교회에서 성경강론의 정상화를 이루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가정교회를 함부로 대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허구다. 왜냐하면 가정교회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내 자녀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비밀을 알려주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은 나 스스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맞는지 더욱 의심하게 한다.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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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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