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영적 사망, ‘철학적 사유’ 바탕 알기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철학(哲學, philosophy)은 위 인용에 나온 개념으로 바꾸면 ‘육신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신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영적 사망의 상태이기 때문에 철학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피조물 인간끼리 만들어내는 허망한 상상이 그 본질이다. 달리 말하면 철학적으로 사유(思惟)한다 내지 생각한다는 것은 죽은 시체가 풍기는 악취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본문은 보이는 현상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이나 인간의 상상력이나 철학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차원의 철학에 대한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 철학이란 개념은 말 그대로는 ‘소피아 곧 지혜를 사랑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혜가 무엇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철학 개념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는 성경 본문에 나온 하나님의 지식이 없는 영적 ‘사망’이 그 원천이며 그 사망 상태는 ‘육신의 생각’이라는 작용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 인문학의 범주 내에서 서양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비록 그 정의가 다양하더라도 철학적 사유의 바탕은 하나님을 아는 생명이 그 안에 전혀 거하지 않는 ‘사망’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神學)을 수립한다고 하면서 쉽고도 너무 안이하게 다양한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럽고, 인용한 본문의 표현을 사용하면, 하나님과 원수(怨讐)가 되는 허망한 지식 체계를 조작하는 꼴이 된다고 본다.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생명의 말씀을 사망의 늪으로 던져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자멸(自滅)의 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인용한 성경 본문 개념들을 좀 더 깊이 새겨보면서 철학적 사유의 바탕을 지배하는 ‘영적 사망’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본문에 나타난 ‘육신’이란 몸과 살을 가진 신체라는 뜻이다. 인간 신체를 통상 세 가지 요소 즉 지정의(知情意)로 칭하는데 이는 단지 육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 인격을 말한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혈육(육신)에 대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 수 없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 타락한 인간 본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창 2:17)일 뿐 아니라 심판주이신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고 맞서고자 하는 창조주에 대한 대적 본성이 지배하는 상태(창 3:12)다. 그리고 선과 악을 자기 기준대로 결정하고 자기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평가하므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저주 받은 본능이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일체를 이루면서 선과 악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판단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내적 본성 상태, 죄의 권세에 종노릇 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며 바로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상황이다. 자기중심으로 선과 악을 결정하는 육체이기 때문에 자기 기준으로 진리와 거짓, 선행과 악행, 의와 불의를 평가한다. 모든 인류가 동의하는 합리적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중심의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합리적 동물’이라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생각에 생각을 더할수록 생각의 주체가 자신이라 확신하면서 생명의 원천인 창조주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망 권세의 구조가 지배한다.
이성적 사유를 하는 동물 ‘호모 사피엔스’에게 내려진 가장 무서운 저주는 마치 동물의 욕구와 본능처럼 자기 좋을 대로 사유하면서 그 사유의 원천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늪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법에 순복(順服)하지도 않으려고 할 뿐 아니라 순복할 수도 없는 저주 받은 상태가 바로 ‘철학적 사유’의 원천이다. 철학의 발생지이며 풍부한 신화(神話)의 고향이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은 다름 아닌 각자 자기 좋은 대로 마음껏 잡신(雜神)을 만들던 우상 제작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만한 어떤 능력도 없는 무지(無知)의 어두움 상태, 이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더하면 더할수록 그 생각은 점점 자기중심적 세계를 만든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들어 그 운행을 주관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영광을 드러내듯이,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이용해 우주 만물의 기원을 상상하여 조작한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예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추측들을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논리적으로 구성하여 타인의 공감(共感)을 얻으면 ‘인간 이성(理性)에 의한 합리적 판단’ 즉 ‘철학적 사유’라는 그럴듯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지정의(知情意)라는 인간 인격의 종합적 활동으로 드러나는 ‘육신의 생각’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어떤 주장이라도 창조주와 심판주인 절대자 하나님을 ‘근거’로 내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각의 주체는 반드시 이성적 판단을 내린다는 ‘인간’이 항상 지배해야 하며 모든 생각의 근거이어야 하며 최종 재판관이어야 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각을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전능자, 절대자 하나님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 이렇게 보면 철학적 사유 과정은 생각의 근거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들어올 여지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출발하고 인간의 설득을 얻는 과정이어야 하고 인간이 만족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다. 이른바 ‘생각의 깊이가 더한다’는 것은 생각의 뿌리와 최종 열매를 만드는 주체가 오직 인간이어야 하고 그럴 경우에만 인간에게 만족스러운 ‘진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철학적 사유에서는 사라진다.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배척과 부정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다. 생명의 근원을 알고자 시도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상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 뿐인 영혼이 죽은 존재, 사망 권세에 지배받는 피조물 인간이며, 이러한 영적 사망의 권세에 종노릇 하는 인간의 사유를 ‘육신의 생각’이라고 한다. 가령 그리스도의 사역이 ‘죽음을 멸하는 것’(딤후 1:10)이라고 할 때 죽음 곧 사망은 육신의 생각을 멸하는 심판 사역을 하셨다는 뜻이다. 사망 권세를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이라는 철학적 사유는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창조주의 주권적 심판의 증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이를 ‘헛된 속임수’라고 알려주며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한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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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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