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어린이날, 무너진 ‘가정교회’를 살려야 ‘주의 자녀’가 산다!
‘2022년 어린이날’은 역사로 보면 상징적 의미가 크다. 100주년이라는 한 세기를 꽉 채운 해에 맞이한 어린이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0년 아동학대 통계는 100주년을 맞이한 어린이날을 충격으로 내몬다. 그리고 그 충격파는 작년 통계가 발표되면 예상컨대 더 클 것이다. 아동학대 가해자 82%가 부모다. 피해 아동 43명이 사망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제출된 보건복지부의 ‘2020 아동학대 연차보고서’를 보면 어린이날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극단적 판단을 할 만큼, 증가하는 아동학대는 이른바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의 지위를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2020년 아동학대로 최종 판정 받은 사례 3만 905건은 5년 전보다 무려 3배나 증가했으며 부모의 아동 학대는 두 배 이상 늘어났다는 말이다. 종교가 기독교인 가정에서 발생하는 학대를 별도 조사하는 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충격적인 통계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아동학대 신고 건수 4만 2천251건은 5년 전 신고 건수 1만 9천214건의 두 배 이상이다. 2020년 신고 건수는 하루 평균으로 나누면 124건이 된다. 작년 통계가 아직 나오지 않았는지 아마 신고 건수는 또한 절망과 충격으로 드러나리라 본다. 아동 학대의 주범 82%가 부모라는 말은 낳아 놓고 학대해서 다시 죽인 자가 부모라는 말이다. 남의 탓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량한 태도이지만, 국민 세금을 받아 이 업무를 처리하는 부처인 복지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의심스럽다. 질문을 받으면 한결같이 ‘실효성 있는 예방을 위해 아동학대 현황과 실태 확인에 우선 주력하겠다’는 건조한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부모인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미 추모객을 맞이하는 정인 양 학대와 사망 사건은 아직도 생생하다. 올해 어린이날은 정인 양 추모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양평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추모객과 추모 물품은 감정 저지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기가 일쑤다. ‘아동학대 피해자가 없는 세상’, 이 절체절명의 슬로건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아이를 길러본 부모로서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형제 사랑’을 역설하며 가르치는 기독교 지도사로서 낯을 들 수가 없다. 하루 80여 명 그리고 매년 급증하는 아동학대, 2022년 100주년 어린이날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2020년 통계로 아동학대자 76%가 친부모, 17%가 대리양육자, 친인척 5%다. 모두 합하면 98%, 가장 가까이서 아동을 돌보아야 할 자들이 학대자란 뜻이다. 그런데 이 통계는 단지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것만 집계한 것이고 경찰서나 공공기관에 접수한 것은 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보도는 지속적인 재학대 사례가 증가한다는 것이며 신체 및 정서 학대를 비롯 성 학대와 방임 등 ‘중복 학대’가 급속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40명대 사망자 중에 만 1세 미만이 19명(45.2%)으로 가장 많았는데 이른바 세상에 왔지만, 세상 빛을 볼 수 없었던 ‘핏덩이’들이다. 양육해야 할 집이 학대 공간으로 둔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19 대 감염 유행병으로 인한 재택근무와 비대면 수업의 증가로 인해 더욱 가정에 집중해 있다. 그나마 학교에 있는 동안은 친구라도 있어서 잠시 잊을 수 있었는데 그러한 여지도 사라진 것이 코로나19가 지배하던 암울한 아동 학대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진단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평가하는 심각함이었다. 이제 눈을 돌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경우 기독교 가정을 보자. 우리의 가정교회를 생각하면 세상보다 더 슬픈 어린이날이 아닐까 하는 부모의 무한 책임이 압박해 온다. 선물을 받고 아들의 활짝 웃는 발랄한 모습이 무너진 가정교회 현실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모는 아이에게 피조물의 유일한 참부모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게 소개하고 있을까?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해 부모부터 얼마나 어느 정도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할 수 없다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바르게 소개하는 일은 근본부터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처럼 물량 공세로 어린이날 하루를 대충 때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올바른 성경적 교회관이 부재할 때 가정을 주님의 몸 된 교회로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교회는 혈육으로 시작하지만, 혈육을 넘어선 차원 곧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깨닫고 불러서 찾게 하는 결정적 기관이다.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는 현장이 바로 가정교회이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전체 과정은 부모의 자녀로 길들이는 과정이 아닌데, 우리의 경우 기독교 가정이나 세속의 가정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어떤 율법적 규율을 만들어 명령하고 지시할 수도 없다.
한국 교회 초대 교회 역사를 일궜던 선교사들은 병원은 물론이지만, 아이들의 돌봄을 위한 고아원과 학교 건립이 필수 사업이었다. 인간의 기본 생존과 사회적 삶을 위한 기본 교육의 차원이었지만 이들이 염두에 둔 것은 비인간적이고 폐쇄적인 유교적 가족관을 극복하는 것이 궁극 목적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성경을 가르쳤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했고 타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형제요 지체임을 몸소 실천했다. 이러한 교육의 실체가 바로 ‘주일학교’ 곧 ‘교회의 성경학교’였다. 기독 학교의 채플(chapel) 시간은 단지 예배 의식이 아닌 모든 학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깨닫게 하는 그야말로 하나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난 비밀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고백하는 자리였다.
작금 수도권 지역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60% 이상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 수치는 분명 더 증가했을 것이다. 세대별 소통 부재는 기독교 가정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 말은 세대를 함께 소통할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달이 가정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학원 가라’는 명령 대신 ‘성경 공부하자’고 부탁하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부모가 성경에 무지한 현실이 더 안타까운 현실이다. 좋은 분위기로 함께 모인다 한들 현재 한국 교회 교육 방식과 수준으로 부모의 입에서 ‘성경 함께 보자’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년들에게 체계적인 성경 공부를 안내하는 교회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기독교 가정의 가장(家長)이 영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두툼한 용돈과 화려한 선물로 무너진 가정교회의 안내자로서 부모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매우 슬픈 한국 가정교회의 현실이다. 매우 슬픈 어린이날이다. 내년은 덜 슬프기를 바란다. 자녀는 어떤 경우에도 부모 기준에서 노엽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자녀이기 이전에 ‘창세전 하나님의 자녀(엡 1:3)’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가정교회’를 파괴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