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신앙과 애국의 숭고한 조화를 기억하며
다가오는 3월 1일은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이하는 3·1절 기념일이다.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나라를 빼앗겨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 9년, 나라 잃은 조선의 백성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비폭력 만세운동을 전개하면서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대한독립을 선언했다.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졌다. 200여만 명이 참여한 비폭력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인구(1,678만 8천 명)의 12%가 참여하고 60여 일 동안 1,542회의 독립만세 외침이 울려 퍼졌으며 고종의 장례식과 맞물리면서 나라 잃은 비통함과 독립 쟁취의 갈망은 특별한 조직을 만들 필요도 없이 독립의 함성으로 모아졌다.
3·1독립만세운동은 중국의 반제국·반봉건 운동인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저항 운동의 효시 역할을 할 만큼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그 의의가 큰 사건이다. 비무장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시작한 이 운동에 일제는 무도한 진압으로 참혹한 희생을 가했다. 일제 헌병에 의해 학살당한 사망자는 7천5백 명에 이르렀다. 60여 일 동안 매일 평균 125명이 일제의 총칼 앞에 독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체포·투옥당한 자는 5만여 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도 1만 6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독립만세운동의 선두에 그리고 선혈이 뿌려지는 희생의 현장에 또한 형무소와 고문실에는 늘 신앙의 선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05주년 3·1절에 즈음해 우리는 일제에 맞선 비무장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진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들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며 평화적 방법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나아가 아시아와 인류 전체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통치하길 염원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다가온 시대적 사명 앞에서 어떻게 고귀한 신앙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이타적 애국심을 보였는지 재조명하고 되새기고자 한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조선을 침탈한 1910년부터 일제는 헌병경찰 체제로 조선의 행정과 군사와 치안 등 모든 통치권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억압했다. 일제가 파견한 육군대장이 조선에 대한 무력 통치의 실권자였다. 일제의 무단통치 혹은 헌병경찰통치는 조선의 백성에게 수치와 모욕 그 자체였다. 이는 당시 발생한 고종의 승하(1919년 1월 21일) 사건과 맞물리면서 백성들의 울분을 더욱 끓어오르게 했다. 일제에 의한 고종의 독살설이 무성한 가운데 고종의 장례일은 뭔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심전심이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대한독립선언은 이미 국외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만주 길림성에서 또한 도쿄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이 함성이 서울에서도 그 역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3·1독립선언은 천도교 창시자 손병희 선생의 주도로 33인이 참여했다. 주요 참가자는 기독교(16명)와 천도교(15명)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3월 1일 당일 33인은 무력충돌을 우려해 독립선언서를 약속 장소인 탑골공원이 아닌 한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던 요릿집 주점 태화관에서 낭독했다. 그리고 약속이 지체된 시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인물은 해주 감리교회 출신으로 교육자였던 정재용이었다. 이날의 독립만세 함성은 이틀이 지난 3월 3일 평안남도 사천에서도 이어진다. 이 운동을 이끈 인물이 한예헌 목사였다. 그는 교인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했으며 그 현장에서 일본 헌병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73명이 죽는 사천학살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도 3천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성공회 병천교회 출신 진명학교 김구응 선생은 지역 유지들, 청년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현장에서 김 선생은 총탄에 쓰러졌으며 이 비보를 듣고 온 어머니는 자식의 시신을 안고 통곡했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 총칼로 어머니까지 찔러 살해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도 총검에 찔려 모두 돌아가셨으며 체포당한 유관순은 고문을 견디다 다음 해 부모 곁으로 간다. 유관순의 가족뿐 아니라 그 일가들도 상당수 교인들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3·1 만세운동 직후 체포당해 투옥된 9,500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400여 명으로 전체 36%를 웃돌았다. 그리고 조선 팔도의 교회들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앞장서서 비폭력 운동을 이끌었던 운동의 선두에 신앙의 선배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삼천리 반도에는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수없이 잇달았고 그 희생의 앞자리에는 늘 신앙 선배들이 서 있었다. 1919년 3월 6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는 바로 곽산교회였다. 수천 명이 참가한 곽산 독립만세운동에서 일제의 헌병들은 독립운동가 박지협을 체포 직후 타살했으며 체포한 시위 군중 100여 명 중 50여 명을 잔인한 고문으로 죽인다. 비무장 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은 물론 광견(狂犬) 도살용 쇠갈고리로 시위군중 수천 명을 참살했다. 곽산의 참살(郭山一慘殺)이라고 칭한다. 또한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에서 헌병 중위가 학살을 저지른다. 이전에 발생한 진압을 사과하겠다는 거짓말로 주로 청년들을 교회당으로 불러 모아 가둔 후 29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채를 불태웠다. 잠긴 문을 열지 못해 벽을 부수고 탈출하는 자들을 모두 사살했으며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는 부인 2명도 사살한다.
1919년 4월 4일 군산에서 신앙의 선배인 문용기 선생이 보여준 운동의 역사도 유명하다. 문 선생은 익산 이리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4월 4일 장날 거사의 선두에 섰다. 12시쯤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참여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었고 이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일제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까지 동원하고 창검과 총·곤봉·쇠갈고리를 휘두르며 잔인한 진압에 이어 무차별 학살을 이어갔다. 이때 문용기 선생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잘랐고 태극기도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는 왼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이어갔으며 이번에는 왼팔마저 잘린다. 두 팔을 잃은 몸으로 계속 나아가며 만세를 외친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그를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했고 독립만세 외침과 함께 순국의 최후를 맞이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만세운동의 앞자리에서 민족의 독립을 비폭력 운동으로 선도했다.
주전 6세기 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왕이 금 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이를 거부하고 풀무 불 죽음을 선택한다. 이때 세 친구들은 풀무 불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경배할 것이며 금 신상에는 절하지 않겠다고 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킨다.(단 3:17-18 참조) 창조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다니엘 세 친구의 시대에서 1919년 3월 1일을 지나 지금도 무한한 신적 은총과 긍휼로서 임하고 있다! 일본 헌병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의 앞자리를 지켰던 수많은 신앙 선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소중한 유산으로 보여주고 남겨주신 것에 깊은 사랑과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