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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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7-05 09:2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어떤 재벌의 현금 기부, 한국 교회의 사회적 기부 확대의 계기가 되길


한국 모그룹 회장의 현금 기부가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고물가, 비싼 이자, 취업난, 대수출 적자, 내수 부진,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과 경제 타격 등등 경제적 어려움이 전국을 강타하는 상황에서 고향 주민 280여 명과 많은 동창들에게 한 명당 2,600만 원부터 최대 1억 원까지 현금으로 입금한 사례는 그야말로 단군 이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고향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이유와 함께 고향 6개 마을 주민 280여 명뿐 아니라 고향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들에게 그리고 고등학교와 군 복무 동기들에게도 현금을 지급했다. 이렇게 현금으로 기부한 금액은 1,400억 원에 이른다. 회사 재정이 아닌 사재(私財)를 털어 통 크게 한 이러한 기부는 물품 기부까지 포함한 근래의 액수만 2,400억 원에 달한다. 사회 고위층에게 필요한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및 사회에 대한 책임 곧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는 한국에서 특이 사례임이 틀림없다.
몇 년 전 수백억 원대 횡령과 배임 혐의로 징역을 선고받기도 한 이 기부자는 한국 재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기부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고향 사람들과 동창들 그리고 동기들에게 행한 금번 현금 기부는 어느 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재벌들이 흔히 하듯 정치꾼들에게 그 많은 돈을 정치 헌금으로 내는 것이 회사와 개인에게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너무도 빤한 계산법을 포기하고 사회와 시민에게 이렇게 기부한 예는 흔하지는 않다. 기록에 보면 2014년 국내 500대 기업 중 매출 대비 기부금 1위가 그 회사이기도 했다. 이 기부자는 자신의 고향에 특히 교육 부분에 많은 기부를 했다. 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및 강당 그리고 아동복지시설 등을 건립했으며 장학금 지원 같은 사회공헌 활동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자신의 고향에 초중고등학교 95개, 대학교 12개, 기숙사 87개 등을 지어 기부해 왔다.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경험으로 이 기부자는 특히 교육 분야에 많은 기부를 했다.
자신이 속한 그룹 회사들도 국내외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자신이 복무했던 공군에 군 생활 5년 반 동안 매끼 식사 2인분을 제공받은 대가에 밥값을 갚는다며 하늘사랑 장학재단에 100억 원을 기부했다. 또한 호국보훈을 국민의 사명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저술한 역사서 ‘6.25전쟁 1,129일’을 출판해 학교와 도서관에 무상으로 전달하면서 6·25 전쟁의 아픔을 알리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2015년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 유엔 참전비와 추모석 예산이 부족할 때도 건립 완공을 위한 기부를 아끼지 않았다.  천문학적 액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금액을 기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차하면 권력을 잡고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된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이 재벌의 기부는 참으로 특이한 역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시대 신선하게 다가온 어떤 재벌의 현금 기부 행위를 보면서 오래전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송받던 구약의 유명한 ‘의인’(욥 1:1) 욥을 떠올릴 수 있다. 인류의 생존과 보호 그리고 인류 공생과 공존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치밀한 일반 역사 섭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 일어나는 ‘미덕(美德)’은 고대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임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선행도 사회적으로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화신(化身)으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욥의 선행은 장차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를 풍요롭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사건이다. 재벌의 거액 기부를 보며 우리는 박수와 큰 성원을 보내면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재차 더 깊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교회에도 그러한 기부에 인색하지 않고 이해타산을 떠나 더 많은 기부를 위한 지출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고대 동방 최대의 의인이자 기부자였던 욥의 사건에서 성도들과 교회는 대사회적 기부의 의의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죄인을 위해 온 몸을 던진 부요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지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사회적 기부와 그 실천 방안을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7 그 때에는 내가[욥-필자 주]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8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9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10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11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12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욥 29:7-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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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하고 폭행당한 선생님들, 우리의 소중한 피붙이입니다
‘연구윤리진실성’의 보루가 허물어지다,희대의 논문 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