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아이러니(Irony)
굳이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청년실업률이 상당하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사측은 쓸래야 쓸 수 없는 인재교육의 부재를 탓하고 노측은 사회구조를 건드린다. 그러나 사측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실무 위주의 훈련은 교육적 측면에서 순수하지 않다. 교육의 총체적 실패를 거론한다면 ‘교육으로의 회귀’라는 근본혁신이 먼저다. 교육혁신이란 기능 위주가 아니라 ‘올바른 눈’을 가진 사람을 육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에 지혜롭게 대처할 사람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육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의 한계는 무엇인지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애플(Apple)은 “누구의 지식이 가르쳐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교육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절대불변의 지식이 아니며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계급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의견에 부합하는 사례는 숱하다. 멀게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며 가까이는 이명박 정부의 역사교과서 강제수정지침이나 현 정부의 역사 국정교과서화 추진 등이다. 도덕, 사회 교과의 내용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철학을 심으려는 시도는 정부의 교체 시기와 맞물려 작동된다. 게다가 전경련과 같은 경제단체에서도 은밀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학교에 뿌리박으려 노력한다. 경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사들을 학교현장에 파견해 특정한 가치를 주입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런 노골적인 것뿐만 아니라 각 교과의 콘텐츠를 무엇으로 채워 넣고 무엇을 뺄 것인지도 고민한다. 아이즈너(Eisner)가 말하는 영교육과정(Null Curriculum)이다. 교과에 제시된 위인들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교체되거나 기존 인물들이 삭제되기도 한다. 교과서 개편이라는 허울 좋은 이유로 말이다.
근래 혁신교육에서 강조하고 있는 ‘배움중심수업’은 다양한 목적과 취지로 시작되었지만 순수한 ‘배움’으로의 접근을 내포하고 있다. 배움중심이란 전달자중심이 아니라 학습자중심이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는 생산자중심에서 수요자중심이라는 사회경제적 현상과 맥을 같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다. 함석헌의 말마따나 교육의 지향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는 의미다. 배움중심수업은 기존의 교과서를 위주로 하여 윗세대의 문화를 아랫세대에 전수하는 단순함의 탈피며 정권의 통치철학이 반영된 교과서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생각하는’ 아이로 키우려는 접근이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길러진 기성세대의 문화를 변혁하려는 적극적 운동이다. 그러나 흠이 없어 보이는 이런 혁신교육운동도 현실과 맞닥뜨리면 한계가 드러난다. 강희룡(2015)은 ‘공교육정상화, 혁신학교, 그리고 절합(Articu-lation)의 정치학’이라는 논문에서 학생들이 ‘배움’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이 ‘경쟁’과 ‘청년실업’으로 대표되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상쇄시키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배움이라는 근본적인 학습에 순수하게 접근하기 어렵다. 중등학생만 되어도 독서와 담쌓고 대입에만 열중하게 된다. 설사 배움 중심으로 접근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마주할 세상은 노동력 착취와 실업중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배움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유아교육과의 한 교수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유아교육과 취업률이 왜 높은지 아세요? 이직률이 높기 때문이예요.” 그는 학생들의 실습이나 취업관리 등과 관련, 각지의 유치원을 방문할 때마다 제자들의 근무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실감한다고 했다. 노동 강도가 센 반면 급료는 적으니 끊임없이 직업에 대해 회의(懷疑)를 한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이직을 한다고 해도 도긴개긴(‘도찐개찐’)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우리는 쉽게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습성이 있다. 배움중심수업이라는 교육계의 혁신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낡은 틀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순수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여, 사회 제반 현상을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접근으로서의 배움 중심 교육의 시도는 사회 제반 현상에 제압당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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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진희 집사 (장안중앙교회) |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1) |
잊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