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형님께
형님! 주 안에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시죠? 저 셋째 동생이에요. ‘큰형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요. 형님은 건넌방에서 주무셨잖아요. 유독 저만을 불러서 품에 안고 주무셨거든요. 그때 느꼈던 따뜻한 온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마음에 담아둔 생각들을 형님 생전에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어요. 때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형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안식에 드셨거든요. 이제라도 공개서한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려고요.
어린 시절 교회당에서 ‘오르간’을 반주하며 찬양대 연습도 시키고 지휘도 하던 형님의 모습이 아련히 기억나요. 미남이신 형님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형님도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저는 중학교 시절 형님처럼 학생찬양대를 지도하며 여자 대원을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흥분이 되었어요. 20대 초반까지 성자가 되려는 노력에 육체의 정욕이 커다란 장애가 되었거든요. 청소년 시절의 순박한 동생의 모습이었답니다.
해방 직후, 갑자기 6·25동란이 발발하자, 형님이 인민군으로 끌려가셨던 일이 기억나요. 영영 헤어지는가 싶어 얼마나 울었는지 형님은 알지 못하잖아요. 먼 하늘만 바라보고 형님의 얼굴만 그려 보며 살았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후에 얼마 지나 형님이 집으로 돌아오셨죠. 너무 기뻐서 방 한구석에서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기쁨도 잠시 형님은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지요. 동생은 너무 섭섭하기도 했지만, 한편 휴가 나오시면 건빵 먹을 생각에 위로받기도 했어요.
동생이 초등학교 시절에는 형님이 장손이라는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고민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엿볼 수 있었어요. 조금 철이 들었던 것 같아요. 형님은 제대하고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셨지요. 동생은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후 동생도 돈이 없어 화가의 꿈을 접은 채, 성자의 꿈을 안고 집을 떠났지요. 기도원에서 성자의 수련을 하며 고민과 갈등을 겪는 중에, 갑자기 형님에 대한 비보를 접하게 되었거든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성경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형님을 위로해드릴까! 여러 날 궁리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게 되었어요. 기도원에서 양봉업을 하며 생활하시는 집사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벌들이 바쁘게 꽃가루와 꿀을 나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고민도 갈등도 다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꿀 한 통을 사서 열차에 싣고 고향을 찾았지요. 형님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어찌 된 일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아버지께서 조용한 어조로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어요. 형님이 돈을 벌기 위해 강원도 어느 도시 근처에 있는 교회로 찾아가 전도사님과 인연을 맺고 날마다 일터에 가서 돈을 버는 대로 전도사님에게 위탁했다고 들었어요. 몇 해가 지나 큰돈이 되어 이제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려고 생각하고 전도사님께 말씀을 드렸다면서요. 순간 형님의 꿈은 뜬구름이 되고 말았다고 하시더군요. 전도사님이 야간도주를 했다면서요. 형님은 절망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열차를 타려다가 쓰러져 열차에 부딪혀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오랜만에 형님과의 상봉은 슬픔 중에 보내고 아쉽게 헤어졌지요. 동생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세상에 믿을 사람이 있을까!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엄포를 연발하는 주의 종이 그럴 수가 있을까! 아마 형님도 같은 생각에서 얼마나 분노가 치솟았을까!’ 하며, 그때 나도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기에 형님은 교회도 등지고 출석하지 않았거든요. 고향에 있는 교회 목사님도 사기꾼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아버지를 비롯한 온 식구가 안타깝게 생각을 했죠. 이미 장로 장립을 받으신 아버지께서도 형님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교회에 나가자는 권면도 하지 못하셨거든요.
형님은 스스로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지요. 아버지께서 경작하시는 밭을 팔아 사업자금을 마련하여 자그마한 양계장을 시작하셨잖아요. 집도 짓고 결혼도 하여 사시다가 서울 주변 도시로 이사했지요. 아담한 집도 마련하고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조카들을 낳아 잘 사시고 계셨잖아요. 그때 저는 서울에서 이른바 명문대학 신학연구원에 다니면서 아담한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버지께서 추수를 끝내시고 아들들을 돌아보시려고 상경하셔서 저의 집에 며칠을 머무셨거든요. 하루는 긴 한숨을 내쉬는 거예요. “아버지!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라고 여쭙자, “아니다.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라고 하시기에 “그런데 왜 긴 한숨을 내쉬세요?”라고 여쭈었어요. 아버지는 한참을 묵묵히 계시다가 “너의 큰형이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라고 하시기에 “그럼요. 언젠가는 하게 되겠죠.” 하고 위로를 드렸죠. 아버지는 조금 후에, “내가 장로라고 할 수 있겠니? 자격이 없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고민하며 살아오신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형님! 살아계실 때 몇 번이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갑자기 병석에 누웠을 때는 주저되더라고요. ‘너나 잘 믿어!’라고 거절하실 염려도 있지만, 마음이 아프잖아요. 이마에 손을 얹어보기도 하고 손을 주물러보기도 하다가 힘을 내어 말씀을 드렸죠, “형님! 하나님 살아계신 것 믿으세요?”라고 묻자, “그럼 믿지.”라고 하시는 순간, 깜짝 놀랐죠. 의외였으니까요. 힘을 얻어 “형님, 죄인이라는 사실도 믿으세요?”라고 물으니까 “죄인이고 말고.”라고 하시기에 “그럼 예수님께서 형님의 죄를 대속하신 것도 믿으시나요?”라고 묻자, “그걸 왜 안 믿겠니?”라고 하셨거든요. “할렐루야” 찬송하며 기도를 드렸죠. “집을 나간 탕자도, 한편 강도도 구원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여! 여기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심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자, “아멘”으로 화답하는 형님의 눈꼬리로 주르르 흐르는 회심의 눈물을 보았어요. 형님! 주 안에서 편히 주무시는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셨을 거예요. 아마 아버지께서 형님을 보시는 순간 ‘잃었던 내 아들 돌아왔구나!’라고 하시며 탕자처럼 끌어안아 주셨겠죠.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곁에서 만날 때까지 편히 쉬세요.
2021년, 셋째 동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