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과 진정으로, 온유와 겸손으로
6월에는, 짙푸른 녹음 속에서 묻어나는 상큼함 보다, 아스라이 머언 포연 속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울부짖음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동족상잔의 6.25 한국전쟁 !
그 쓰라린 상처들이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남아 있는데, 천안함 침몰사태로 인해 그 아픔이 다시금 도진 듯이 쓰리고 아프다.
거짓의 세력들이 우월한 군사력과 치밀한 계획으로 선제타격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으시고, 60년이라는 세월동안에 저들은 참담한 거지의 모습으로 저주하시고, 이들은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제 3 세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경제개발에 성공한 국가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해 주는 나라로 바뀌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아직도 이 나라에는 우상숭배와 거짓의 세력들이 활개치고, 거짓이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황당하고,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려 오는 고통을 경험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단군개국 이래 가장 자유롭고, 가장 풍요로운 삶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분이 기뻐하시는 소망의 싹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은 죄악 가운데 있고, 아직은 거짓 가운데 살고, 아직은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모습이고, 아직은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지만, 머지않아 복음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 갈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축복의 열쇠를 주겠노라고 말씀을 하신다.
주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부정한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나,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존숭하고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오늘도 수가성 우물가의 그 부정한 여인 같은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욜 2:3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상)
위의 두 말씀은 언뜻 보기에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의 의미는 같은 의미이다. 다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신앙자세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또, 주님은 당신이 권능을 베푸신 고을에서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책망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는 삶에는 평강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는 잠언의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요 4:24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 마 11:29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 왜 축복의 키(key)가 될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요 4:24)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온유하고 겸손한 삶(마 11:29)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또는 하나님의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 만 톤이나 되는 거대한 배도 작은 키(key) 하나에 의해 움직이고, 난공불락의 성문도 작은 키(key)하나에 활짝 열려지듯이, 성경 66권속에 들어 있는 진주보다 더 귀한 생명의 말씀들이, 은혜의 말씀들이 이 작은 말씀의 키(key)로 인하여 우리 안에 들어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고, 믿음 안에 굳게 서게 하며, 은혜와 평강의 축복으로 인도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진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진리대로 이루어짐을 믿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부조리한 듯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헤아릴 지혜가 필요한데, 그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의 바른관계를 맺어갈 때 주님께서 주시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