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스물 셋. 로고스의 생동력 1: 개신교도 학살과‘종교적 자유’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1517년 종교개혁은 유럽의 종교적 및 정치적 지형도를 그야말로 격변의 무대로 몰아갔다. 유럽 곳곳에서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를 양산했으며 그로 인한 심각한 종교적 및 정치적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는 각각의 종교 집단들과 권력을 더 강화하려는 세속 군주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로마 교황청의 신임을 받고 있는 군주들과 왕들은 로마 가톨릭 세력과 공모하여 더욱 그 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 중북부에서 가장 가까운 폴란드에도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 사이의 갈등과 투쟁은 물론이고 종교개혁 운동이 확산되면서 개신교도 사이의 종파적 갈등도 심각해졌다. 그리고 유대교나 정교회 종파들도 가세하여 서로 이해관계를 따지며 이합집산하는 양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에는 개신교도라고 하지만 비성경적 주장으로 이단 사상을 유포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16세기 말 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성자는 성부에, 성령은 성자에 종속시키는 종파가 있었다. ‘소치니안(Socinians)’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출신 소치니 가문의 삼촌(렐리오 프란체스코)과 조카(파우스토 파올로)는 폴란드에 ‘라카우 아카데미’를 설립한다. 그리고 이 기관을 통해 ‘반삼위일체 신앙선언문’도 작성하여 그 지역에 폭넓게 배포하기도 했다. 이들은 재산의 공동 소유, 평화주의, 신분 철폐를 주장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소수의 종파와도 종교적 연대 세력을 형성했다. 로마 가톨릭과 대립하고 있던 그리스 정교회나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신론을 고수하는 유대주의자들과도 연합했다. 그러면서 소수이나 자신들의 종교적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종교다원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시도의 배경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성(聖)바돌로뮤 대학살’ 사건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 세력을 추종하는 당시 프랑스 집권 세력들이 칼빈주의를 신봉하던 프랑스 개신교도들(위그노)을 사흘 동안 파리 시내에서만 3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로마 가톨릭 진영에 속해 있던 영주나 군주들조차 경악하게 했던 이 사건은, 역사가들에 의하면, 프랑스 전역에서 약 7만 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된 음모에 의해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이 사건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던 왕가(王家)가 저질렀던 사건이다. 자신들의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적대 세력으로 낙인찍고 처참하게 학살한 사건의 배후에는 당시 왕 샤를르 9세의 누이 ‘캐더린 드 메디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자 왕 샤를의 동생인 마가렛과 개신교 지도자인 나바르의 왕자 앙리(Henry of Navarre)의 결혼식을 학살의 기회로 이용했다. 딸을 미끼로 한 이 대학살의 참극을 개신교도들은 알 리가 없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로마 가톨릭과 벌이는 치열한 종교 분쟁이 파리에서는 적어도 종식된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성장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캐더린은 프랑스 모든 개신교도들을 학살할 음모를 준비했다.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에 거행되었으며 축하객은 모든 귀족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유명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식 뒤에 숨겨진 대학살의 음모를 모르는 프랑스 개신교 대표들과 신도들은 구교와 신교의 상징적 결혼식을 축하했다. 하지만 며칠 후 성바돌로매의 날(St. Bartholomew's day) 8월 24일 밤 축제가 무르익을 때 성 제르마인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참극이 시작되었다. 쇠몽치에 죽어가는 갓난아이들을 비롯해 아이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노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유명한 신학자 페투루스 라무스(Petrus Ramus)는 기도 중에 목이 잘려 길거리에 버려졌다. 3일간 계속된 이 참극은 루브르 왕국의 계단을 피의 냇물이 흐르게 했으며 파리 시내와 세느강도 같은 색깔로 물들였다. 당시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황제 막시밀리안 2세도 이 소식에 공포를 금치 못했으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했고 칼빈주의의 본 고장 제네바는 이 비보(悲報)를 듣고 시 전체에 금식을 선포했다.
그런데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이 참극을 축하하면서 ‘하나님께 찬양’(떼 데움, 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게 하고 감사의 특별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개신교도들을 학살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메달도 만들었다. 한 손에는 십자가가 들려 있고 또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천사가 새겨진 메달이었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로마의 시당국은 너무 기뻐서 축제를 벌였으며 그것을 기념하여 3일간 시내의 등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의 열렬한 신봉자인 스페인의 필립(Philip) 2세는 난생처음 웃음을 터트렸다고 스페인 사가(史家)들이 전한다.(인터넷 ‘개혁주의학술원’ 자료 참고)
1572년에 발발한 성바돌로뮤 대학살은 유럽의 개신교도들을 다시 한번 결집시켰으며 종교 자유에 대한 목소리는 더욱 간절하고 강렬해졌다. 그래서 폴란드에서는 1573년 바르샤바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을 추종하는 프랑스 권력가들과 폴란드 가톨릭 주교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중요한 결의가 있었다.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그 합의문의 일부다. “종교에 대해 생각이 다른 우리는 서로 평화를 유지할 것이며, 신앙의 차이나 교회의 변화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재산의 압수, 공민권 상실, 수감, 혹은 추방 등으로 서로 처벌하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든 그런 식으로 관리나 군주를 돕지 않을 것이다.” 당시 폴란드 개신교도들은 이 합의가 이루어진 날을 기뻐하면서 자신들의 국가는 타종교에 대한 박해가 없는 국가라는 뜻에서 ‘화형대가 없는 국가’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폴란드에서 그 이후의 현실은 개신교도들에게는 여전히 평안한 상황은 아니었으며 이후 폴란드를 비롯한 서유럽과 나아가 영국에서도 개신교도와 로마 가톨릭, 개신교도의 종교 및 정치의 자유 요구와 국가 권력의 통제와 억압은 종교 전쟁을 야기하게 된다.
<186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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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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