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식 고통 이해: 최고의 의미를 찾아라!
불가(佛家)에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특별한 초월신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인간의 자기 극복을 강조하는 불교 사상의 기반이다. 드넓은 바다에 비유해서 괴로운 고통이 끝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인생이라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가 고통이다.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뭔가 속고 있는 기분이며 자기모순의 답답함으로 짜증스러워진다.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배운다. 그리고 커가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목적한 바가 이루어지면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런데 고해라는 말을 곱씹어보면 ‘행복한 순간’도 고통의 연속선상에 있다. 성취감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절망과 좌절의 원인이 된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계속해서 불행의 씨앗을 만들고 있다는 모순에 휩싸인다. 이러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사랑하는 관계가 원수 사이가 되는 예는 부지기수다. 그렇게 뜨겁게 만났던 사랑하는 부부가 다음 세상에서는 결코 만나기 싫은 철천지원수가 된다. 그렇게도 많이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에 ‘배신’과 ‘배반’의 역사가 성립한다. 행복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 된다. 살고자 분투하는 것이 자기 몸의 병을 키워 스스로 죽음을 더욱 재촉하는 일상의 예도 허다하다.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그 길이 바로 자기가 빠질 고통의 무덤을 하나씩 파고 있는 꼴이다. 이렇게 진퇴양난에 빠지는 것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인생의 비극이다.
이러한 실존적 자기모순의 상황에서 고통의 의미를 철저하게 사유했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게 된다. 니체의 말을 먼저 살펴보자. “인간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니체, 『도덕의 계보』 III 28: KGW VI 2, 429쪽) 고통의 필연성은 인정하되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의 통일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통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의 본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앞서 말한 내용 그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어떻게 고통의 의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인가? 니체는 고통의 의미부여와 관련해서 인간에 대한 자기 입장을 우선 전제한다. 니체에게 인간은 가치 창조를 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니체는 인간의 생존 욕구를 지배하는 내면적 동력이 있다. 바로 ‘힘에의 의지’다. 힘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의지의 운명이다. 힘으로 향하는 의지의 중요한 특징은 더 큰 힘을 항상 추구하기 때문에 인생은 ‘상승’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생은 힘에의 의지를 통해 부단히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의미부여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자기모순도 간파한다. 다시 말해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면 만들수록 그 가치가 최고 가치로 우뚝 서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 가치의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 그 가치는 추락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니체 철학의 의의와 한계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왜냐하면, 최고 가치를 만들어 인생의 고통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은 힘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최고로 적절한 의미를 고통에 부여하면 또다시 힘에의 의지로 인하여 방금 수립했던 의미를 포기해야 한다. 인생을 지배하는 힘에의 의지가 삶을 상승시켜주고 있는지 아니면 삶을 점점 허무하게 만들어놓고 있는지 모호해진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니체는 자신이 파놓은 또 다른 고통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힘에의 의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이내 그렇게 부여한 가치가 무가치하게 변하고 인생 고해에 별무소용이 된다고 비웃는 듯하다. 어쨌든 모순이라는 니체의 말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최고 의미를 인생 내부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높게 상승해보자는 힘에의 의지가 삶의 욕구를 쉼 없이 자극하지만, 그 욕구는 결국 자기 살을 스스로 갉아먹는 파멸의 숙주인 셈이다. 니체가 시도한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 이것은 결국 다시 우리를 더욱 견디기 힘든 고해(苦海)로 몰아넣어 버린다. 최고 가치, 어떻게 어디에서 부여할 것인가?
성경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최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자. 구약 성경 ‘욥기’에는 당대 동방의 최고 의인 욥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나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맏형 집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도적들이 몰려와 나귀를 빼앗고 종을 죽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수많은 양과 종을 불살라버렸다. 연이어 또 다른 도적이 몰려와 약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 고통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곧이어 대풍(大風)이 몰아쳐 집을 붕괴시켰고 욥의 모든 자녀들을 몰사시켰다.
하나님 앞에서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던 자가 당한 처참한 비극이다. 성경은 고통의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고통의 바다에서 그 의미를 철저하게 묻게 한다. 이 고통 속에서 성경은 분명하게 인도하는 방향이 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존재와 그의 능력을 자기 백성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냉정하고 너무 냉정해서 순수한 진실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대참사의 고통 속에서 욥도 이렇게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백하도록 안내를 받고 있다.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 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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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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